남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만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기

by 봄볕


나 정말 지쳤어.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그동안 몇 번 힘들다며 속내를 토로한 적이 있었지만 하루 이틀이면 괜찮아져서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는데 어쩐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잔뜩 그늘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20년 동안 거의 쉼 없이 직장 생활을 해 온 남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새로운 회사로 이직한 후 스트레스가 심한 모양이었다. 몇 마디의 위로로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어서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사이에 두고 남편과 마주 앉았다.



잠시 쉬고 싶어.


무겁게 입을 뗀 그가 말했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일인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표를 내고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우리는 아이가 없으니 남들과 똑같이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현실에 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자는 그의 말이 내게 달콤하게 파고들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너무 일렀다. 돈을 더 모아서 새 아파트를 장만해야 하고, 구입한 지 5년이 넘어 슬슬 낡아가는 차도 더 좋은 걸로 바꿔야 하고, 양가 부모님 용돈도 드려야 하고, 우리 노후도 대비해야 했다.(너무 돈돈돈! 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에 갇혀 있었다.)


돈 들어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차분하게 들어주려 마음먹고 있었건만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와버렸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힘들어서 하는 일시적인 투정이길 바랐다. 나 역시 결혼하고 직장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느라 힘든 상태였다. 삶이 버겁고 재미없었지만 남들도 다 이러고 산다고 다독이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고 견디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해진 수순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 결혼을 하고 노동의 대가로 돈을 저축하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틀에 그럭저럭 맞춰 살아왔는데, 갑자기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목적지 없이 방황하기는 싫었다.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남편은 불안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원했다.




내 관심과 주의는 온통 미래로 쏠려 있어서 '지금'을 즐기자는 그의 말이 와닿지 않았다. 나중에 은퇴하고 삶을 즐겨도 될 것 같은데 더 버텨주지 못하는 남편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스트레스로 인해 점점 건강이 안 좋아지는 사람에게 직장을 계속 다니라고 종용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혼자서 다녀와.
좀 쉬고 오면 머리도 맑아질 거야.


남편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혼자서는 가지 않겠단다. 인생에서 부부가 같이 해외 살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며 이번에 함께 다녀오자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그로 인해 긴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얼 위해 이렇게 애쓰며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항상 행복해지기 위한(그것도 주로 물질적인) 계획만 세우고 정작 삶의 즐거움이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 내온 걸 떠올리게 되자 어쩌면 남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고민 끝에 결국 둘 다 회사를 그만두고 보라카이로 떠나기로 했다. 처음에는 치앙마이, 발리, 조호바루, 괌 등 다양한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다 바다가 예쁘고, 치안이 안전한 편이며 도착하자마자 영어연수를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보라카이로 최종 결정했다.(두 달간 그냥 쉬기만 하면 무료할 것 같아 영어연수도 계획에 넣었다.) 남들이 볼 때 무모한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다는 점을 밝힌다. 물질이 주는 안정감보다 남편의 건강과 현재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함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또 없을 거라 생각되어 내키지 않지만 모험에 동참하게 되었다. 나중에 재취업이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슬며시 올라왔지만 애써 외면하고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오르기로 했다. 안정된 삶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붙들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리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정이기도 했다.


재취업이 안 되면 뭐라도 해서 먹고살 수는 있겠지.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막연한 낙관론이 이럴 때는 위안이 되었다.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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