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날아오른 비행기는 몇 시간 후 우리를 새로운 땅에 내려놓았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긴 입국심사 줄이 우리를 맞았다. 열악한 공항은 제대로 된 대기실을 갖추고 있지 않아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견디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관광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대체 어디에 쓰는 거야?' 속으로 툴툴거리며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절차를 하나씩 밟았다.
드디어 짐을 찾고 픽업 업체의 버스에 올랐다. 보라카이로 가는 여정의 험난함에 대해서는 출발 전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인천 공항에서 칼리보 공항까지 항공편으로 4시간, 공항에서 까띠끌란 선착장까지 육로로 1시간 30분~2시간, 선착장에서 보라카이 섬까지 배로 30분, 섬 선착장에서 숙소까지 버스로 20~30분 걸려 도착하는 길고 번거로운 여행길이었다.역시 천국의 섬은 사람들에게 호락호락하게 그 품을 내어주지 않았다.
고된 여정으로 파김치가 될 무렵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 앱에서 사진과 후기만 보고 예약한 곳이라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시설이 괜찮았다. 외국인 장기체류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어서 깔끔하고 냉방도잘 되었다. 자체 발전기가 있어서 수시로 정전되는 상황에서도 시원하고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
총 3층 건물이었는데 우리가 묵을 방은 가장 꼭대기층에 위치해있었다. 문을 여니 전면에 있는 창문과, 이곳이 바로 보라카이라고 알려주는 듯한 큼직한 보태니컬 그림이 눈에 띄었다. 기본적인 가구와 주방 공간, 욕실이 딸린 널찍한 원룸이었다.
건물을 관리하는 현지인 부부는 순박해 보였고말이 별로 없었다. 1층 입구에 있던 여행가방을 남자가 가쁜 숨을 내쉬며 3층에 있는 우리 방까지 날라주었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팁을 주자 그가 활짝 웃었다. 곧이어 여자가 들어와 간단한 영어로 몇 가지 안내사항을 알려준 뒤 자리를 떴다.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한 후 기진맥진한 채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간신히 물에 젖은 솜뭉치 같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보라카이에 도착한 첫날인데 이대로 잠들 수는 없었다.
해변을 어슬렁대며 걷다 스테이션 2와 3 사이에 위치한 한적한 레스토랑을 발견하고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다. 'Cesi(쎄씨)'라는 곳이었는데 음식 맛은 그저 그랬지만 첫날 간 곳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해 질 녘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미구엘 맥주를 마시고 calamari sisig(오징어 시시그)와 파스타를 먹었다. 원래 sisig는 돼지머리나 간을 잘게 썰어 고추, 깔라만씨 등과 함께 볶아 돌판에 내 오는 필리핀 전통요리를 말하는데 이 식당에는 고기 외에도 해산물이 들어간 다양한 종류의 sisig이 있었다.
듣던 대로 보라카이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한 풀 꺾이고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바다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다는 시시각각 분홍빛, 주홍빛, 자줏빛으로얼굴을 바꾸며 황홀감을 안겨주었다.
아, 살 것 같다.
말없이 지는 해를 바라보던 남편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집에서와 달리 생기에 빛나고 있었다.
'그래, 잘한 거야... 일단은 즐기자.'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한 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했던 나는 남편의 표정을 보고 그런 고민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다시 오지 않을이 시간을 최대한 즐기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