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인 핫플은 어디?

호텔과 화이트비치가 지겨운 당신이라면

by 봄볕


AKY station!


C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녀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현지인 강사와의 수업 중에 갈만한 로컬 맛집이 있는지 막 물어본 참이었다. 그런 내게 C는 뜬금없이 주유소 이름을 알려준 것이었다.


AKY station? Is it a restaurant?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물어보자, 까만 생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그녀가 머리 색깔만큼 짙은 눈을 크게 뜨더니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AKY station 근처에 푸드코트와 카페가 있어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데, 특히 그곳에 있는 카페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가면 'real coffee'를 마실 수 있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쯤에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카페에 가서 진짜 커피를 마시는 게 뭐 대수라고,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내가 머무르던 3년 전에는 보라카이에 신선한 원두커피를 파는 카페가 드물었다. 중심지인 D몰 근처나 호텔에서는 그런대로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을 수 있었지만 가격이 비싼 편이어서 현지인들은 주로 봉지에 담긴 인스턴트 가루커피를 마셨다. 그래서 C는 'real coffee'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녀의 강력한 추천에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 숙소로 가지 않고 AKY station으로 향했다. 트라이시클에서 내리니 'BETC Coffee Bean'이라는 간판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여기인가 봐.


필리핀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에는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커다란 지붕이 얹혀 있어서 입구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주문을 할 수 있는 계산대가 보였다. 아이스커피와 스페셜 커피를 주문한 후 자리를 잡고 앉으니 조금 후에 유리잔 두 개가 우리 앞에 놓였다. 환경보호를 위해서인지 플라스틱 빨대가 아닌 금속 빨대가 꽂혀 있었다.



어떤 맛일까.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아이스커피부터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갈색의 액체가 입속으로 흘러들어오자 좀 전의 기대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허탈한 음이 찾아들었다. 원두의 향이 미세하게 느껴지기는 하나 인스턴트커피와 비슷한 맛이었다. 다크 아라비카 품종으로 내렸다는 뜨거운 스페셜 커피는 아이스커피보다 좀 더 부드러운 맛이었으나 역시 원두의 풍미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돗물 맛은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전에 숙소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아마도 현지인들이 주 고객인듯한-에 들어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가 수돗물 맛이 너무 심하게 나서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그냥 나왔던 적이 있다. 이곳의 커피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직접 원두를 갈아서 내린 커피치고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일반 brewed coffee는 25페소라고 하니 로컬 커피 체험을 해보고 싶으면 저렴하게 그걸 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참고로 우리가 주문한 아이스커피는 100페소, 한화로 약 2,300원 돈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맛이었지만 그래도 싱그러운 초목이 우거진 공간에서 현지인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를 마시니 섬사람들과 조금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진짜 커피'라는 점을 강조하며 본인의 핫플레이스를 우리에게 추천해준 순박한 그녀도 고마웠다.





커피를 마시고 나오는 길에 보니 바로 옆에 'JT'S manukan grille'이라는 음식점이 있었다. 마침 출출하길래 들어가서 치킨 이나살과 돼지고기 바비큐를 주문했다. 이나살은 숯불에 구운 고기를 말하는데 필리핀 사람들은 빨간 라부요 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새큼한 깔라만시즙을 듬뿍 넣은 간장에 이나살을 곁들여 먹는다. 직원이 안내해준 대로 잘 구워진 닭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매콤하고 짭짤한 라부요 간장에 찍어 먹으니 궁합이 잘 맞았다. 거기에 산 미구엘 맥주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 가격도 화이트비치에 있는 식당들보다 훨씬 저렴해서 만족도가 높았다. 어학원 친구들에게도 이곳을 소개했는데 역시나 반응이 좋았다. 이나살은 현지에 있을 때보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더 생각난다. 언젠가 보라카이를 다시 찾는다면 숯불향 감도는 이나살을 먹으러 이곳을 다시 방문할 계획이다.




AKY station 근처에는 널찍한 푸드코트도 있었다. 해산물 요리, 로컬 음식, 인도음식 등 다양한 요리를 팔고 있어서 색다른 요리가 먹고 싶었던 어느 날 저녁, 남편과 이곳을 찾았다. 칠리새우와 갈릭버터 새우, 깡꽁(모닝글로리) 볶음, 갈릭 라이스를 주문하고는 맥주를 마시면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편없는 맛이면 어쩌지, 슬슬 걱정이 될 무렵 완성된 요리가 하나 둘 테이블에 놓이기 시작했다. 한번 구운 후 양념을 발라서 볶아낸 새우요리는 생각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운 모양새로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으음~ 통통한 새우살을 입 속에 넣고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언젠가 남편이 어느 명상 관련 서적에서 읽었다며, 건포도를 그냥 씹어 삼키지 말라고 했다. 과육 한 알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면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면 평소의 건포도와는 전혀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떠올리며 새우살을, 마늘밥을 그리고 깡꽁 볶음을 차례로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입 속에서 재료와 양념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맛을 감상했다. 한국에서처럼 시간에 쫓길 일도 없으니 느긋하게 먹고 마시며 무르익어가는 밤을 한껏 즐겼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글을 쓰고 있으니 오래된 수채화처럼 어렴풋했던 그 밤이 조금씩 선명한 색채를 찾으며 되살아난다.




현지인 강사 C가 알려준 핫 플레이스 'AKY 틴다한 마켓'. 화이트비치에 있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처럼 세련되게 꾸며져 있지는 않지만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음식을 즐기고 싶거나 보라카이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은 곳이다. 3년 전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이제는 제법 유명해져서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모양이다. 유명해지면 가격이 오르고 고유의 분위기를 잃기 마련인데 나중에 다시 방문할 때까지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 친근하게 남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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