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음 달에 남동생과 여동생네 가족이 보라카이에 머물고 있는 우리 부부를 보러 온다는 것이었다. 직항 편이 있는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교통이 불편한 이곳까지 일부러 찾아와 주는 마음씀이라니.
한 달여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동생네 가족을 만나는 날. 메시지에 적힌 숙소로 찾아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국에 있던 동생들과 보라카이의 조합이란 어쩐지 낯설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들. 정말 왔구나! 환한 웃음과 왁자한 수다로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두 동생 내외와 올망졸망한 세명의 조카들이 함께하는 7일간의 여정에 나섰다. 관광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와 다르게 동생네 가족은 주로 리조트 안에서 머물면서 느긋한 휴가를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낮 시간은 수영장과 해변에서 물놀이를 즐기다가 선선해진 저녁 무렵에 중심가인 D몰 구경을 나섰다. 그렇게 삼사 일간 평온한 휴가 일정을 보내고 있을 때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한 남편의 제안.
다 같이 호핑투어에 참여하는 게 어때?
마침 남동생과 제부도 리조트 안에만 있기 무료했던지 흔쾌히 동의하여 온 가족이 호핑투어에 나서게 되었다. 투어 당일, 다 함께 약속 장소인 스테이션 1에 있는 A호텔 앞으로 이동했다. 모래사장을 걷는 우리 손에 들린 건 타는 듯한 더위로부터 잠시나마 해방시켜줄 망고주스 한 병씩. 얼음이 서걱거리는 노란 액체로 갈증을 달래며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투어에 참가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몇 분 정도 기다리니 업체 직원이 와서 간단한 소개를 했다. 참가자별로 인적사항을 적은 후 트라이시클에 나눠 타고 블라복 비치로 이동했다. 우기에는 화이트비치의 파도가 거세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결이 잔잔한 블라복 비치로 이동해서 투어를 한다고 했다. 호핑투어용 배에 탑승해서 구명조끼를 착용하자 이제 곧 열대어가 가득한 바닷속에 들어갈게 실감이 나는 모양인지 조카들은 한껏 들뜬 표정을 지었다. 배는 우리를 싣고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먼바다로 나아갔다.
드디어 도착한 스노클링 포인트. 바람이 불어서인지 파도가 꽤 높게 일렁이고 있어서 물속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준비운동을 마친 남동생, 올케, 제부, 그리고 아직 어린 막내를 제외한 두 명의 조카들은 벌써 물에 들어가 신나게 바다를 누비고 있었다. 나도 남편의 격려(?)를 받으며 미끄러운 사다리를 딛고 내려가 어설프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몸을 휘감는 차가운 바닷물. 이내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동안의 호핑투어 경험만도 네다섯 번은 될 텐데 왜 익숙해지지 않는 건지... 구명조끼에 의지해 몸을 띄운 채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몸에 힘 빼 봐. 안 가라앉아." 옆에서 남편이 다독이며 손을 잡아 주니 한결 의지가 되었다. 몇 분 정도 지나자 차가운 바닷물에 몸이 적응되면서 점차 편안해졌다.
갑자기 우리 근처로 와르르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배 위에서 직원들이 미끼용 빵 부스러기를 던진 모양이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지느러미와 선명한 빛깔을 자랑하는 열대어들. 바로 근처까지 와서 주둥이를 콕콕 박아대더니 먹을 게 다 떨어졌는지 잽싸게 방향을 바꿔 저 밑에 있는 산호초로 헤엄쳐갔다가 다시 근처 바위 사이로 쪼르르 몰려갔다. 비단자락 같은 꼬리를 나풀거리며 마치 묘기라도 부리듯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며 바닷속을 누비는 작은 생명들.
물속 세상에 한참 정신이 팔려 있다가 고개를 드니 다른 사람들은 벌써 카약을 타고 있었다. 큰 조카를 태우고 파도와 씨름하는 제부 옆으로 둘째 조카를 태운 올케가 노를 저으며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Y야, 그렇게 움직이면 흔들려서 더 위험해. 엄마 믿어. 괜찮아." 긴장해서 찡찡대는 조카를 달래며 씩씩하게 노를 젓는 올케. 평소에도 시원시원한 성격에 배짱이 있는 편인데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대범함을 잃지 않았다.
지쳐서 잠시 바다에 누운 채로 떠 있으니 꿀렁대는 파도가 입 안에 짠맛을 선사했다. 이마와 눈꺼풀을 뜨겁게 달구는 한낮의 햇살을 피해 배로 올라갔다. 좀 기다리고 있으니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하나 둘 바다에서 나왔다. 배는 우리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 뒤로 다른 스노클링 포인트를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떠오르는 장면은 뉘엿뉘엿 해 질 무렵 배 지붕 위에 모여 앉아 현지인 악단의 연주를 들으며 어두워지던 바다에 멍하니 시선을 던지던 순간이다. 한지에 먹색의 물감이 은은하게 퍼져 나가듯 차츰 어두워지는 바다 위로 구름이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찬사를 늘어놓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운치 있는 정경이었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노을이 그 빨간 얼굴을 내밀 때면 사람들이 반가워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가장 아름다운 일몰은 아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몰이었다.
두둥!두둥! 두두두두 둥둥! 악단이 두드리는 타악기의 원시적인 리듬이 습기를 가득 머금은 짠 바람과 어우러져 두 볼을 감쌌다. 뒤를 돌아보니 10살짜리 큰 조카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실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머리칼,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해진 얼굴로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던 그 아이가 그날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부디 그 순간의 기억이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로 조카에게 스며들었길.
호핑투어 외에도 보라카이에서 지내는 동안 남편은 스쿠버다이빙, 서핑, 패들보트, 프리다이빙 등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겼다. 현지 여행사의 저렴한 상품을 이용한 덕분에 비용은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
"자기야, 보라카이에서 한 해양스포츠 중에 어떤 게 제일 좋았어?"
"좋았던 거? 글쎄... 다이빙 체험이 제일 기억에 남네."
"느낌이 어땠는데? 말해봐 봐."
"음... 처음 물밑에 내려갈 때는 좀 무섭지. 귀도 아프고. 이퀄라이징 하는 법을 알려주는데 그게 잘 안 되거든."
몇 마디 하더니만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무는 남편. 이 남자!! 답답해서 원.
"자기야, 그게 다야? 또 없어? 최대한 자세히 말해줘. 나 글 써야 돼."
"그게... 처음엔 좀 겁이 나는데 강사가 뒤에서 두 명씩 잡아서 끌고 다니거든. 조금씩 움직이다 보니 긴장도 풀리고 재미있더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지."
남편은 바다 밑에서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 설레고 흥분됐다고 한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이라나.(그의 표현력이 여기까지라 더 이상 자세하게 묘사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사진 속 남편의 모습을 보니 다음번에는 나도 주저하지 말고 도전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새롭게 경험하는 만큼 내 세계 역시 넓어질 테니까.
글을 쓰며 삼 년 전 보라카이에서의 기억을 불러내어 장면 하나하나를 다시 음미해본다. 단둘이 보내던 조용한 일상에 선물처럼 찾아온 가족의 방문이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두 달간 열대의 섬에서 느긋하게 지내면서 도시의 건조한 삶에 찌들어있던 몸을 원시의 자연에 풍덩 담그고 물과 바람과 햇살을 흠뻑 받아들이던 그곳에서의 시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내게 힘이 된다. 그리고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는 소중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일상을 훨씬 풍요롭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