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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May 11. 2023

우리가 약해지는 순간에는, 약한 것들이 주변을 지켜준다

단단하고 변형되지 않는 둘레, 헝클어지지 않는 컵을 쥐어 본다. 방금 내린 커피가 담겨 있다. 컵은 평생 이 모습을 유지한다. 뜨겁거나 차가운 것을 담아도 컵은 변하지 않고 몇 번을 씻어내도 닳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써본다. 이런 컵이 집에 대여섯 개가 있다면 이 얼마나 든든한 생활인가.

그런데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물건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 모양이 쉽게 변하고 어그러지고 젖고 구겨지고 사라지는 것들도 필요하다. 무게가 있고, 좀처럼 깨지지 않고 자신을 유지하는 것들은 탁월해 보이지만, 그것이 월등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연약한 것과 단단한 것들을 쥐면서 살아가니까.



울거나 콧물이 날 때. 더러는 피가 날 때, 휴지나 손수건이 필요하다. 따뜻한 커피는 그 다음에야 필요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에 걸려 삼일을 앓고 보니 주위가 온통 휴지 더미였다. 아픈 동안 쥘 수 있는 것은 고작 휴지 정도 밖에 없었다. 우리가 연약해지는 순간에는 연약한 것들이 주변을 지켜준다. 종이접기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밑작업을 새롭게 시도해 보았다.


코로나로 일주일 동안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종이를 접고 있을까 궁금해서 카페를 검색했는데, 카페는 무려 20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2003년도에 개설). 게다가 진위를 의심할 수 없도록 완벽한 이름 <종이접기 카페>으로 명실상부했다. 회원은 무려 7만 명이 넘었다. 내 주위에 어느 누구도 종이접기를 하지 않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종이를 접고 있다니!


카페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종이접기 작품을 올리고 함께 감상하는 것이다. 여러 날 작품을 감상하며 몇 가지 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품 사진을 올릴 때는 창작자명과 작품명, 그리고 사용한 종이 스펙을 기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 불법 유튜버를 언급해서는 안 된다.


불법 유튜브라니, 무슨 뜻일까? 유튜브를 보고 접을 수 있는 것이 혁신적인 종이접기 교육인 줄 알았는데(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긴 하다) 그건 종이접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진입하는 통로였다. 바로 나잖아…! 콧물이 나는 순간이었다.


종이접기 도면에도 저작권이 있다

이것은 종이접기에 대한 흔한 오해와 관련이 있다. 첫째, 종이접기는 무명의 누군가로부터 대대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 창작자가 있다. 지금도 창작자들은 새로운 종이접기를 개발하고 있다.


둘째, 따라서 도면에는 저작권이 있다. 종이접기 작가나 창작자가 무료로 공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셋째, 놀라운 점은 종이접기 도면은 사실 딱 1장이라는 점이다. 종이접기 방법을 한 스텝씩 설명하고 접는 것은 초보자들의 방법이었다...!


한 장의 도면에 모든 선이 들어가 있어 도면 사진과 작품 사진으로 충분하다는 것. 심지어 종이접기는 대칭인 경우가 많아, 한 장짜리 도면에서 반을 생략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접는다.


불법 유튜브란 창작자의 허락을 맡지 않고 접는 과정을 영상으로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생각보다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유튜브로 종이접기를 알리는 사람 중 불법 유튜버가 아닌 경우는 두 종류 뿐이다. 창작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리거나, 창작자가 누구인지 표기하는 경우이다.

 

문제의 도면을 살펴보자. 이것을 CP라고 부르는데 한 장의 도면에는 접는 순서나 방법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전개도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가장 처음 접어야 할 줄기와 그 다음을 구분할 수 있다. 도면을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으며, 프로그램을 다루는 방법부터 각도에 관한 수학과 점을 잇는 가짓수 등 수학 이론에 대한 글도 많았다.

▲ 작품명: 두루미, 창작: 마시코 료스케. 오리스트, <도쿄대 수재들의 리얼 종이접기>에밀, 2021              ⓒ 마시코 료스케

각도 중에는 특히 22.5도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이 각을 특별히 애정하는 작가들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종이접기 나라에는, 아니 카페에는 이미 알려진 것을 겨우 따라 접는 초보자가 있고, 도면을 보고 접을 수 있는 고급자가 있으며 도면을 창작할 수 있는 고수들이 살고 있다.


▲ 작품명: 고양이, 창작: 가쓰카와 히가시. 오리스트, <도쿄대 수재들의 리얼 종이접기>에밀, 2021              ⓒ 가쓰카와 히가시

이것은 뜨개질 도면이나 악보를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종이접기 도면에는 이렇다 할 비밀스러운 기호는 없다.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충분히 암호처럼 보이지만, 종이를 처음 접는 가짓수는 2개뿐이라는 사실이 힌트가 되어준다. 삼각형으로 접기거나, 직사각형으로 접기. 그것을 접고 나면 그다음 스텝을, 또 그다음 접기를 선택해 나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약한 종이가 알려준 사실

코로나로 격리되어 앓는 동안 알게 된 것은 아픈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휴지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종이접기 '도면'이 한 장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저런 동물을 접은 지 2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몰라도 그만인 앎인 것 같지만 도면을 보고 접기를 시도해보려는 일이 새롭게 반가운 것은 비로소 종이접기 고급자로 가는 길을 하나 알게 된 것 같기 때문이고,

단단하고 빛나는 질감, 완성된 어떤 것만이 인생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까닭이다. 아프고, 찢기고, 다시 낫는 것을 기다리는 것도 삶의 일부분이니까.


삶은 언제나 조금씩 변하고 움직인다. 바닥이 불안정하고 물을 담을 수 없다면 당신은 지금 컵이 아니라 종이에 가깝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날들을 요즘이라면, 한 없이 가볍고 무게도 없고, 그다지 쓸모도 없어 보이는 종이를 반 접어보자.


한 장의 어지러운 전개도에 뜻을 알 수 없는 선이 모여 고대의 생물이 되기도 하고 기사가 되기도 한다. 이 사실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알게 된 이상, 세상이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처럼 눈이 밝아질 지도 모르겠다. 


구겨지고, 접히고, 아주 작아지는 종이가 알려준 사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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