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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보기

나의 20대를 만든 8가지 직업 12 - 대형 로펌에서 여름을 보내다

by 봄바람

인터뷰 시즌이 끝나고 로스쿨 학생들 마다 갈 로펌이 생기면, 학생들 마다 2학년과 3학년 사이의 여름에 10주의 인턴 생활을 시작한다. 정확히는 "인턴"이 아니라 "summer associate"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다. 로펌은 큼직하게 세 가지 레벨로 직급이 나누어지는데, 파트너 (partner), 카운슬 (counsel), 어쏘 (associate)으로 나누어진다. 로펌에서 처음 시작하는 변호사들은 모두가 어쏘로 시작하고, 해당 어쏘가 어느 정도의 책임을 가지고 일을 진행해야 하는지 분별하기 위해 1년 차, 2년 차, 3년 차 등등 이렇게 서로 연차를 듣고 내가 이 사람한테 지시를 내려야 하는지 지시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한다. 로펌마다 살짝 다르지만, 어쏘가 7년 차 정도면 다음 해쯤에는 파트너가 될지, 카운슬이 될지, 아니면 파트너가 되기에는 약간 더 지켜보고 싶어 어쏘로 조금 더 남아있을지 대충 그림이 나온다고 한다.


서머 어쏘는 여름에 10주 동안 로펌에서 "어쏘"로 활동하는 로스쿨 학생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로펌들이 요즘에는 조금 더 진짜 어쏘들이 하는 일들을 가르쳐주는 트렌드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10주는 모든 로스쿨 학생들이 로펌에서 열어주는 여러 행사와 파티에 참여하는 기간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로펌마다 자신들이 뽑은 학생들이 여름이 끝나고 자기네 로펌으로 와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미슐랭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이며, 그 여름에 핫하다는 콘서트 티켓을 대량 구매하고, 야구 경기를 최고의 관람석에서 보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한다. 나같이 내성적인 사람의 성격엔 매 이벤트마다 참여하는 게 상당히 힘들기도 했다. 일단 로펌에 아침 9:30까지 출근을 하고, 오후 5:30 정도에 인턴들 모두 로펌 로비에 모여서 이벤트로 다 같이 움직일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벤트마다 6시에서 9시, 10시까지는 기본이고 그 이후에 애프터 파티가 따로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 새벽 1시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로펌에서 이렇게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리쿠르팅 입장에서 학생들이 여름의 끝에 전부 해당 로펌으로 온다고 하는 것을 바라는 입장에서 하는 것도 있지만, 일단 이런 이벤트가 있어야 여러 그룹의 사람들과 학생들이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러면서 학생들이 직접 그 그룹의 사람들에게 일을 받을 기회도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 로펌은 여름 동안 free market과 assignment coordinator 시스템이 둘 다 있는데, free market은 인턴들이 파트너들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 원하는 일을 받는 것, 그리고 assignment coordinator은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일을 변호사들이 시스템에 올리면 시간이 있는 인턴들에게 그 업무가 주어지는 형태다. 특히 free market으로 일을 받으려고 할 경우 무턱대고 이메일을 보내는 게 어색할 수 있으니, 이런 여러 이벤트의 (골프 배우는 이벤트부터, 쿠킹 클래스까지...)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우와 부동산 일 하시는군요, 항상 관심 있었는데 다음에 혹시 조그만 일이라도 같이 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건넬 수 있다.


그렇게 이런저런 업무도 받고, 이벤트도 참여하다 보면 5주쯤에 로펌에서 중간평가 (mid summer review)를 하자고 보낸다 (이것도 로펌에 따라 다르다). 말이 평가지 사실 듣기 좋은 말을 해주며 관심 있는 분야가 생겼냐고 물어본다.


처음 로펌에 들어올 때 나는 사실 소송 (litigation) 쪽 일에 관심이 있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소송일을 하며 소견 (brief)을 진짜 잘 쓸 수 있다면, 멋있을 것 같다는 (다시 생각하면) 참 어린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로펌은 대한항공 땅콩 케이스의 미국 쪽 변호를 그 해 여름에 담당했었고 (우리가 대표한 쪽은 대한항공/조현아였다) 나는 그 업무를 어쩌다가 운 좋게 받게 되었다 (한국인을 찾던 것도 아닌데 그냥 어쩌다 시스템에서 그 업무가 나에게 주어졌다). 사실 한국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 그 업무를 받았다는 자체가 너무 신기했었다. 그러면서 다른 업무들도 조금씩 받았는데, 자문변호사들의 일과 관련된 기업 (corporate) 업무, 재원 (? finance) 업무, 도산 업무 들을 받았었다.


중간평가 (mid summer review)에서 "뭘 하고 싶냐"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나는 지금은 소송 업무에 관심이 있지만, 다른 분야들도 재밌는 것 같다 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파트너들 중 나에게 "혹시 하고 싶은 질문 있냐"라고 물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사실 나는 이제 변호사로 커리어를 시작할 여자인데, 우리 로펌뿐만 아니라 대형 로펌이라는 세계 안에서 여자 파트너가 많지 않은 게 약간 걱정된다"라고 말을 했었다. 거기 있었던 소송 쪽 남자 파트너 분이 나에게 따뜻하게 건네신 조언은, 아주 현실적으로 대부분 로펌에서 시작하는 어쏘들은 3년 차가 되기 전에 나가고, 사실 소송 일을 하는 변호사들은 로펌에서 다른 곳으로 나가는 게 굉장히 힘들다고 얘기를 해주셨다. 나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정부 (state and government) 밖에 없고, 그 기회도 좋은 기회를 찾기 힘들다고 얘기해주셨다. 그래서 자신은 자신의 딸에게도 자문변호사가 되라고 조언했다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조언을 듣기 전부터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은, "관심 있는 업무"와 "매일 할 수 있는 업무"는 약간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송 업무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막상 업무를 하는 매 순간마다 힘들었고,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소송업무 특성상 리서치도 많이 하고 (West Law와 Lexis라는 플랫폼에서 해당 소송과 비슷한 판례를 찾아야 했었다) 글도 많이 써야 했는데 (그 비슷한 판례를 찾으면 그것을 토대로 소견을 잘 써야 했다) - 나는 내가 정말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판례를 잘 찾았는지 불안했었고, 판례를 다 찾았다 해도 내가 작성한 글이 파트너 마음에 들었는지 확신이 안 섰다. 글이라는 게 워낙 사람의 스타일과 취향을 타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업무를 제출하고도 마음이 하루 종일 찝찝했다.


그것에 비해 기업 자문 업무, 자문변호사들이 주로 해야 하는 업무는, 할 때마다 자신감이 있었고, 제출하는 업무를 잘했다는 확신이 항상 들었다.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았고,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었다. 업무를 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제출하면 일단 하나를 확실히 끝냈다는 느낌에 홀가분했고, 이벤트에 참가하거나 집에 돌아가서도 일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운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 해 여름에 나에게 기업 자문 업무를 많이 주었던 4년 차 변호사가 특히나 피드백을 잘 주는 변호사여서 칭찬도 많이 받았던 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나는 소송 일은 재미있었지만 "매일 할 수 있는" - 적어도 로스쿨 졸업하고 365일 해야 할 수 있는 일 - 은 아니라고 판단을 하고 기업 자문 (corporate) 그룹을 선택했고, 그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다. 미래를 생각해도, 그리고 지난 3년 2개월을 생각해도 내가 여름에 했던 생각과 미래에 대한 예측이 100%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나는 업무에 대해 불안한 스트레스는 없었고, 내가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을 냈다는 스트레스도 없었다. 조만간 대형 로펌에서 나올 마음은 없지만, 나간다고 해도 자문변호사가 필요한 기업은 많아서 소송 쪽 일에 비해 일을 찾기가 쉽다.


가끔 우리는 한순간의 결정이 나의 미래를 얼마나 바꿀지 모를 때가 있다. 아직 로펌 4년 차지만, 지금 다시 뒤돌아보면, 커리어에 있어서는 결정 하나하나가 꽤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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