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를 만든 8가지 직업 13 - 뉴욕, 그리고 대형 로펌의 세계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본다. "지금 하는 일 좋아해요?"
대형 로펌 - 특히 뉴욕이라는 도시의 대형 로펌 - 의 생태계에는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 1-3-5년 차가 항상 고비라는 것이다. 밤낮의 경계가 사라질 정도로 끊이지 않는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부담감이 싫어 1년 안에 그만두는 어쏘들, 그리고 일이 정말 싫지만 돈을 모으기 위해, 혹은 학자금을 갚기 위해 3년 차까지 어떻게든 견디고 그만두는 어쏘들. 그리고 로펌에서 일하는 게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그래도 견딜만하다고 느끼다가 5년 차까지 간 어쏘들이 스스로에게 "이걸 평생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다가 로펌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나의 20대를 만든 8가지 직업"이라는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나는 3년 차였지만, 마무리할 지금엔 4년 차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1년 차 때 있을 고비 한번, 3년 차의 고비 한번. 두 번의 고비를 넘긴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일을 내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지금 일이 얼마나 적성에 맞는지 내가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 특히 M&A 변호사는 계획과 정리를 잘하는 사람에게 잘 맞는 직업이다. 프로젝트가 하나 시작이 되면,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 계획을 매일 정리하고 점검하며, 그날 밤 오늘 일어난 일들 토대로 다시 또 정리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느 회사가 다른 회사를 살 때, 절차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정말 많다. M&A어쏘가 해야 하는 일은, 인수계약서 (Purchase Agreement) 혹은 합병계약서 (Merger Agreement)를 토대로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고 (signing or closing checklist), 매일매일 그 리스트에 적힌 아이템들이 얼마나 잘 해결되었나 체크를 하며 해결되지 않은 아이템들을 아직 해가 떠 있을 시간에 처리를 해야 한다. 아직 인수계약서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어떤 문제들 때문에 상대편과 우리가 이 계약서를 매듭짓지 못했으며, 거기에 계약서와 함께 협상되는 공개목록 (disclosure schedule)에 아직 확인이 안 된 것들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다 파악을 하고 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아직 모니터 앞에 있을 때 전화통화로, 이메일로 서로 왔다 갔다 하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조금 시간이 걸리는 업무들 - 인수계약서를 고치는 작업, 혹은 온라인 실사 방 (data room)에 들어가서 몇백 개의 문서들을 검토하는 작업 - 그런 업무들은 해가 저물고 저녁 7시쯤부터 새벽까지 한다. 그때는 울리는 전화가 적어져서 진짜 해야 할 일에 집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M&A일을 하다 보면 자신의 적성이 어떤지 확실히 알게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와 플래너를 병적으로 좋아했던 나는 이 일이 정말 잘 맞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태 했던 경험으로 알게 된 건, 현실적으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직장을 찾기 힘들 거라는 것이다. 그 "현실적인" 이유들 몇 가지를 얘기해 보겠다.
1. 노동의 시간 대비 연봉.
아무리 일이 많다고 해도 로펌 변호사들이 일 년에 365일 내내 일하는 것은 아니다. 104일의 주말 (토요일/일요일) 중,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강제적으로 있어야 하는 날들은 많아야 열흘일 것이다. 나머지의 주말들은 토요일에 조금 시간 날 때 3시간 일을 한다거나, 일요일 저녁에 3-4시간 일을 하게 된다. 주중에 바쁘게 일을 하고 가끔은 사람들과의 약속을 깨버려야 한다고 해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로펌이 주는 연봉과 보너스는 그것을 압도적으로 커버한다고 생각한다.
2. 연봉과 보너스의 투명함, 그리고 매년 저절로 되는 승진.
그러면 과연 대형 로펌에서 일하면 얼마를 받게 될까?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 부분이다 - 미국 100위 안에 드는 대형 로펌들은 연차별로 모두의 연봉과 보너스가 똑같다. 내가 지금 출근하는 건물 건너편에 있는 다른 로펌에 가도, 그 로펌 5년 차들이 얼마나 받는지를 다 알고 있다. 우리 로펌 안에서 나와 같이 시작한 동기들도 얼마를 받는지 다 알고 있다. 미국에서 나와 같은 동양인 여자는 통계적으로 항상 같은 업무를 하는 "백인 남자"보다 연봉을 적게 받는다고 나와있지만, 그것은 일반 회사의 이야기이다. 대형 로펌에서는 나와 같이 시작한 백인 남자 동기들과 내가 똑같이 받는다는 보장이 되어있다. 흔히 Cravath Scale이라고 불리는데 (요즘엔 Milbank Scale, Davis Polk Scale 등등 "compensation mover"이라고 불리는 로펌들 이름을 따서 연봉과 보너스가 정리된다) 로펌 하나가 연봉을 올리거나 보너스를 더 주면 나머지 99개 정도의 로펌들이 다 그 로펌을 따라 연봉과 보너스를 올리는 것이다.
아주 지극히 평범한 (한국의) 중산층 집에서 태어난 나는, 일 년에 3억은 마음먹어도 쉽게 벌지 못하는 돈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로펌에 있는 어쏘들은 "평균"만 찍어도 - 일을 특출 나게 하지 않고 로펌에서 시키는 일만 해도 매년 저절로 연봉이 올라가고 승진을 받는다. 심지어 모든 로펌들이 당연하듯 매년 새로운 1년 차들을 고용해서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한 사람에게 쏠리지 않게 도와준다.
3. 오래 할 수 있는 일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일).
보통 사람들은 빨리 은퇴하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그 반대이다. 나는 늙어서까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본 어르신들은 소속된 곳이 없어서, 더 이상 내가 사회에서 쓸모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리고 어쩌면 연관된 의미로 내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힘들어하셨다. 모아놓은 돈이 많은 백만장자라 해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강제로 듣게 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이 가치 있다고 먼저 판단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파트너 자리를 놓지 않고 지키시는 우리 로펌의 변호사들을 보면, 일하지 않을 때 오는 허탈함을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겁을 내시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로펌은 내가 느끼기에 오래오래 일하기에 꽤나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하지 않나 싶다. 로펌에서는, 클라이언트에게 필요한 변호사가 되고, 어린 변호사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줄 수 있으며, 자기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변호사라는 직업이 나에겐 그것을 하기 위해 타고난 것 같이 느껴지진 않는다. 천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내 친구들이나 가족은 나의 워낙 다양한 관심사와 그것을 매년 정리하고 카테고리 짓는데 온 힘을 다 쓰는 나를 보며 잡지 편집장이 되었으면 정말 행복했을 거라고 한다. 음악을 좋아하고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하는 나는 작사가가 오랜 기간 꿈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내면을 보게 하는 질문을 하는 나를 보며 동생은 커리어 카운슬러를 정말 잘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잡지 편집장, 작사가, 커리어 카운슬러 - 내가 생각해도 나와 정말 잘 맞을 직업들이지만 인생을 살다 보니 우리는 가끔 - 혹은 자주 - 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잡지 편집장이 되는 대신에 나의 관심사와 많이 겹치는 유튜버의 영상들을 찾고 응원한다. 직접 내가 작사가가 되는 대신에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써진 가사는 음미하고 또 음미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다 알려준다. 커리어 카운슬러가 되는 대신에 내 주변에 나에게 일에 관련된 혹은 로스쿨, 로펌에 관련된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아낌없이 알려준다.
그리고 알고 있다. 이런 여유도, 내가 지금 현실적으로 내가 만족하는 직업을 찾았기 때문에 부릴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