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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 출근, 다섯 시 퇴근

나의 20대를 만든 8가지 직업 10 - 기업 법무팀 인턴

by 봄바람

2015년, 드디어 로스쿨에 들어갔다. 미국 로스쿨을 다니는 학생들의 마인드셋에 대해 아주 짧게 설명하자면, 로스쿨에 처음 들어가는 순간부터 1년 동안 짧고 굵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1학년과 2학년 사이의 여름방학 동안 법과 관련된 일을 찾는 것이 목표다.


물론 학생마다 원하는 직업이 달라서 모두를 대신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미국 안에서 상위 14위권의 로스쿨을 다니는 학생들은 대부분 학자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졸업하고 로펌으로 가려고 한다. 보통 로펌들을 로스쿨 2학년 1학기가 시작하기 바로 전에 로스쿨들에 직접 와서 인터뷰를 보고 가는데, 이 기간에 보통 학생 한 명 당 로펌 20~25곳을 인터뷰 본다. 이때 로펌들이 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해 보는 정보는 1학년 성적, 그리고 여름에 했던 일을 써놓은 이력서, 이게 전부다. 1학년 때 엄청 좋은 성적을 가진 학생들은 평균 성적을 받았던 학생들보다 조금 더 좋은 상황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로스쿨의 대부분 학생들은 1학년 때 정말 미친 듯이 공부를 한다. 모두가 같은 과목을 듣기 때문에 로펌 입장에서는 학생들을 비교하기 쉽고,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만큼 열심히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터뷰 시즌에 로펌 한 곳에서 확정되고 나면, 학생들은 2학년 3학년에는 거의 수업을 안 갈 정도로 마음 놓고 논다 (나는 학자금이 아까워서라도 그러지 못했다). 마음껏 놀 수 있는 이유가, 2학년이 끝나고 나면 여름방학 동안 그 확정된 로펌에 가서 인턴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거의 쇼킹할 수준으로 큰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무조건 로스쿨 졸업 후 해당 로펌에 일하기로 약속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로펌들은 해당 인턴들의 로스쿨 성적은 그냥 절차 정도로만 받아놓는다. (하지만 나 같은 성격은 "만약에"라는 생각에 - 또 오랜 기간 이방인의 경험으로 끝까지 좋은 성적을 받아 놓으려고 했다. 만약 경제가 갑자기 안 좋아 지거나, 예기치 못한 상황 때문에 로펌이 인턴들이나 사람을 잘라야 한다면, 그 "어떠한" 이유라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돈 벌며 일하고 싶었다

로스쿨 1학년 2학기 시작할 쯤에는 모두가 여름에 무슨 일을 할지 찾기 시작한다 (1학년 1학기가 끝나기 전에 미리 잡아놓는 학생들도 있다). 이 때는 대부분 두 가지 전략으로 나누어지는데, 1) 최대한 일자리 잡는데 시간을 쓰지 않고 "법과 관련된 일자리" 하나를 찾고 나머지 시간을 공부하는데 쓰는 전략, 그리고 2) 그래도 여름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나 마음에 정말 드는 정도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열심히 인터뷰 다니는 전략이다. 나 같은 경우는 후자를 선택했는데, 일단 첫 번째 전략은 대부분 내가 로스쿨 들어오기 전 했던 경험과 비슷한 공무원 환경의 일자리나 내가 학생 때 수도 없이 많이 했던 교수님들의 연구 조수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뭔가 색다른 것을 하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그리고 나도 목표가 로펌이었으니, 로펌 들어가기 전에 로펌 말고 일반 회사에서 일해보며 클라이언트의 시선을 알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열정 페이에 지친 것도 컸었다 - 월급이 따박따박 통장에 들어오는 기분을 맛보고 싶었다.


로제타 스톤 (Rosetta Stone)

정말 운이 좋게 일을 하게 된 곳은 Arlington, Virginia (워싱턴 디씨와 정말 가까워서 숙소는 두 정거장 건너면 되는 워싱턴 디씨 안에 잡았다)에 로제타 스톤이었다. 10주 동안 천만 원을 받기로 계약이 되어있었고, 휴일을 제외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9시부터 5시 출근이었다.


로제타 스톤은 언어 배우는 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회사로, 내가 중학교 때부터 Barnes and Noble이라는 서점에 쭉 진열되어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선물로 사갔던 게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영어를 제2외국어 (second language)로 배운 나는, 일반 회사에서 돈을 받으면서 인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 중 로제타 스톤이 나랑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었고 진짜 그렇게 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사실 나를 인터뷰 보았던 곳은 로제타 스톤에 로스쿨 학생을 꽂아주는 큰 단체였는데, 그 인터뷰에서 내가 자라온 이민 환경, 언어에 대한 어려움과 극복 같은 이야기를 풀어냈던 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나 싶다.


막상 기업법무팀에서 하는 일은 회사가 "언어를 배우는데 도움을 주는" 소프트 웨어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인지, 완전히 다른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파는 회사인지 차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엘리베이터 탈 때마다 그 옆에 크게 박혀있던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또 하나의 영혼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To have another language is to possess a second soul)"라는 문구는 항상 나를 기분 좋게 했다.


IMG_3868.jpg 로제타스톤



목표

인턴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목표를 정해두었다. 일단 최종적으로 이 로제타 스톤 경험은 내가 로펌 인터뷰를 볼 때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줘야 했었고, 매일매일 하는 일을 통해 배울 것도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일반 회사는 로펌의 클라이언트로 어떻게 법적 문제들을 보는지 "감"은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일하기 정말 귀찮다는 거 알고 있고, 하면서도 힘들었다. 그냥 매일매일 출근하는 것도 귀찮은데 확실한 목표의식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일하는 것은,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의 안정적인 마음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거부감을 주는 행동이다.


하지만 만 26 정도 되니까 감이 왔다. 대학교와 로스쿨 입시, 수많은 인턴과 알바 경험들을 통해 알게 된 건, 인생에는 단 몇 달의 순간들, 혹은 단 며칠의 순간들이 앞날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을 - 그리고 어쩌면, 그게 지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까지 오는 데의 어려움을 생각해서라도, 조금 쉬고 싶은 마음에 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해야 되는 때는 지금이다, 라는 감이 왔다.


기업법무팀 인턴이 하는 일:

일단 기업법무팀은 진짜로 아침 9시에 출근, 오후 5시의 퇴근이 가능했다. 화요일마다 프랑스 오피스와 런던 오피스에 있는 변호사들과 우리 팀이 화상채팅을 하고 한 주간의 목표와 새로 생긴 일들을 간단하게 얘기했으며, 한 달에 한 번 수요일에는 건물 루프탑에 올라가서 와인을 마셨다 (wine-down wednesdays라는 이벤트였다). 사실 일자리로 생각한다면 정말 이상적인 환경이지 않았나 싶다.


로제타 스톤에서 얻은 것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실제로 로펌 인터뷰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 일반 (테크) 회사의 법무팀의 기능

이런 로제타 스톤 같은 테크 회사들의 법무팀은, 여러 가지 일을 하긴 하지만 하루의 80%는 라이센스 계약서를 읽는데 쓰이는 것 같다. 로제타 스톤은 예전에는 개인 고객에게 프로그램을 팔았었지만, 이제는 학교들이나 큰 비즈니스나 호텔에 프로그램 라이센스를 주는 것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꿨다. 예를 들어 힐튼호텔 직원들이 힐튼호텔에 일하는 것에 대한 혜택으로 회사 이름으로 라이센스 되어있는 로제타 스톤 프로그램을 열고 스페인어나 원하는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크고 굵직하게 라이센스를 주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일반 개개인의 고객을 위해 마케팅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었던 것 같다.


2. 일반 회사 법무팀을 가장 비효율적이게 만드는 것

어느 회사가 그렇듯, 세일즈 팀이 먼저 회사에서 나오는 것을 밖에 가서 판다. 로제타 스톤 같은 테크 회사는 프로그램을 학교들이나 호텔들에게 라이센스 하는 것이 세일즈 팀이 하는 일이었다. 일단 그런 이야기가 오가면 세일즈 팀은 일이 빨리 진행되기 위해 계약서를 바로 내밀고 싶었는데, 여기서 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상대편이 이런 이런 조건을 낸다면, 이게 괜찮은 건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세일즈 팀이 일단 법무팀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법무팀도 하루에 세일즈 팀에서 날아오는 계약서 양이 꽤 많아서 이메일이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빨리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자주 늘어졌다.


이때 법무팀 총괄 변호사가 (general counsel) 세일즈 팀에게 계약서에 대한 이해를 위해 줄 수 있는 문서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고, 나는 내가 한번 하겠다고 했다. 미리 비슷한 문서가 있었지만 그건 27장이나 되었고, 나는 그걸 한 장으로 간추려서 사람들이 일하는 데스크에 핀을 해놓고 볼 수 있는 - 즉 엑기스만 집어넣은, 포스터 같은 문서로 만드는 걸로 목표를 잡았다. 그리고 그 문서를 토대로, 상대편의 어떤 조건들이 "계약의 규모에 따라" 혹은 "해당 비즈니스 (학교/호텔/다른 회사)"에 따라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어떤 조항들이 조심해야 할 조항이며 어떤 부분이 특히 법무팀에게 컨펌을 꼭 받아야 하는 건지 적어 놓았다. 회사 안에서도 이 작은 종이에 대한 반응은 굉장히 좋았고, 나는 이 이야기를 로펌 인터뷰에 자신 있게 풀어갈 수 있었다.


3. 조직적 역사/지식 (Institutional knowledge)

사실 일하면서 배운 것이라기보다, 회사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변호사 한 분과 얘기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하나 있다. 그 변호사님은 법무팀에서 가장 오래 일한 분이었지만 (나와 얘기할 때쯤엔 8년 정도 되셨었다), 직책이 가장 높은 분이 아니셨다. 나이도 있으셨고, 가정도 있으셨다 (무려 딸의 취미가 승마였다... 하하). 그분이 언젠가 나와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나에게 한 얘기가 있었다. 자기가 일을 특출하게 잘하는 것이 아니지만, 회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자기는 분명히 쓸모가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게, 이제 이렇게 오랫동안 회사에서 일해 본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 말에 나도 전적으로 공감했던 게, 세일즈 팀에서 법무팀에게 문서를 넘기면 보통 이 분이 "이건 우리가 하던 방식이 아니다" 혹은 "이런 조항은 몇 년 전에 우리가 허락했다가 결국 몇 달간 골치 아픈 일을 우리가 해결해야 했다"라는 식으로 조직적인 역사를 기억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일을 훨씬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얻은 깨달음은, 한 곳에 오래 남으면, 그곳에 대한 역사를 간직하는 자체만으로도 그 조직에게는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이 그러셨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직업을 많이 움직이는 상황에서는 사실 직업 옮기고 적응하는 사람을 트레이닝시키는 기간에 비효율적으로 쓰이는 시간이 많다고. 이제 어느 기업이든 10년 이상 일 한 사람을 찾기 드문 상황에서, 모든 기업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한다. 회사에 오래 남을 사람을 찾는 것 - 즉 그 시간을 거쳐가며 그 회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


그만큼 기업들도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오래 머물 곳을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하며 배우게 된 나:

아침 9시 출근, 저녁 5시 퇴근. 주말은 온전히 나의 것. 연봉은 $120,000-150,000 (한국 돈으로 1억 4천에서 8천 정도).


정말 이상적인 일하는 환경이었음에도, 나는 이게 내가 원하는 직장이라는 - 커리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왜 일까. 사실 그때는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냥 살짝 공허하다는 느낌밖에. 일 밖에 있는 원인을 깊이 파보자면 그 당시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사귀고 있었고, 일하지 않는 시간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해야 했던 것이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일 자체를 보자면 일단 소프트웨어 라이세스는 내가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일을 하면서 "재밌다"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게 컸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지만,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가 되고 난 후 더 크게 깨닫게 된 것은 "나와 맞는 직업"과 "이상적인 직업"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건 "일"과 별개로 내가 꿈꾸는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생각인 것 같다. 만약 내가 하루의 8시간을 열정이 생기지 않는 일을 하는데 써야 했다면, 나머지 16시간은 그 희생에 충분한 힐링을 해줄 수 있는 것들로 채워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뭘 해야 내가 진정으로 행복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으며, 취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원하는 일을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금전적인 상황이 되지 않았었다.


어쨌든 로제타 스톤에서의 인턴 경험은 아직까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고, 로펌에서 클라이언트 입장을 생각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워싱턴 디씨에서의 2016년의 여름을 추억하면, 나의 젊음을 잘 담아줬던 경험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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