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를 만든 8가지 직업 14 - 마치며
내가 2년 차 때쯤, 우리 로펌의 금융 분야의 일을 하시는 파트너가 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있다.
자기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 그게 칵테일 파티이든, 집들이든 - 자신이 변호사라고 절대 최대한 오랫동안 소개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변호사라고 얘기하는 순간, 심지어 대형 로펌 변호사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기도 전에 그들이 생각하는 이미지를 자신에게 씌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로 맞는 것 같다. 나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변호사라고 하면, 일반적이게 사람들이 나에게 투영하는 이미지와 색이 있다 - 똑부러질 것이다, 이성적일 것이다, 머리가 좋을 것이다, 돈 잘 벌 것이다, 사치스러울 것이다, 깐깐할 것이다, 피곤할 것이다, 바쁠 것이다.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기까지 꽤 오래 걸린다. 나는 아침마다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피아노 앞에서 눈을 감으며 연습할 정도로 감성적이고, 평생 노력파로 살았기에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돈을 잘 벌어도 학자금과 뉴욕의 비싼 생활비로 다 나가며, 명품은 오래전부터 나의 생활패턴과 맞지 않다고 느껴서 그쪽으로 나간 돈은 없다. 깐깐하기보다 오히려 남들에게 지나치게 배려심이 많으며, 확실한 취향이 있지만 그룹 활동에서는 맞춰주는 게 마음이 훨씬 더 편하다. 바쁘지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시간을 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나의 온 집중력을 다한 경청을 준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루의 50%는 변호사로 쓰고 있다고. 나머지 50%의 나는, 배우고 싶은 피아노 곡을 연습하고, 힙합 춤을 배우러 다니며, 쇼미더머니를 보고, 일기를 자주 쓰며, 잠자기 전에 새로 구입한 책을 읽거나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를 보는 그저 평범한 30대의 여자 사람이다.
나의 이런 모습을 아는 친구들은 가끔 그런다. 어떻게 이 모든 걸 할 시간이 나냐고. 워라밸을 잘 찾은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워라밸"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컨셉이라고 느낀다.
"워라밸" 얘기를 가장 많이 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일과 삶에 선명하게 선을 긋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터에 나가면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예 일 생각을 안 하고 싶은 사람들. 일에서 어떤 일이 있던, 일터 밖에서 "나"라는 사람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 일은 그저 나의 삶을 지탱하는, 나의 노동의 대가의 돈을 주는 곳이고 나의 "진짜 삶"은 일터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 이런 스타일의 "워라밸"을 원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선택한 직업에 만족도가 굉장히 낮고, "어쩔 수 없이", "다른 것 무엇을 할지 몰라서", "취직시켜준 곳이 여기뿐이라서"라고 얘기한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생각이고,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이런 식의 마인드 셋이 쉽게 생길 것이라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다-라고 얘기할 만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과연 이런 생각이 지금 하는 일을 싫어한다고 해도 우리가 "일" 그리고 "일터"를 대하는데 도움이 될까 - 라는 질문은 한 번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를 벌던, 얼마나 오래 일하던, 우리가 일터에 나가는 순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일상에 어느 하나의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그 경험을 얼마나 싫어하든,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싶든 우리의 하루에 평균적으로 8시간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들, 그리고 거기서 배우는 것들은 결과적으로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바라볼 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자꾸 "일"과 "내 삶"은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계속 추구한다면 나는 오히려 일에 대한 열정이 있던 사람도 열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분명, 이런 생각을 거듭할수록 일터에서의 시간은 더욱더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최근 읽은 "뉴욕주민"의 <디 앤서>라는 책에서 나온 내용은 다시 한번 나의 생각을 정리해주었다:
"개인 생활과 직업적인 생활이 일체가 된다는 것이 꼭 나쁜 것일까.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있다면, 월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 정말 즐겁고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다면 삶이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경지는, 일이 너무 좋아서 일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도 일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나도 "변호사"로서 그 경지에 도달할지는 모르겠다. 일단 나는 계약서를 읽는 것보다 일반 책을 읽고, 이렇게 아무도 보지 않을지도 모르는 곳에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쓰는 게 훨씬 더 행복하니 말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안정적이고, 경력이 쌓일수록 기하학적으로 높아지는 연봉과 보너스를 받으며 나에게 "꽤나 잘 맞는"일을 찾은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현실적인 것들을 다 따지고 보았을 때, "변호사"라는 직업은 충분히 일을 더 잘하고 싶은 열정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그리고 오래 하고 싶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직업이 정말 괜찮은 직업이라는 것을, 이 직업을 가지기 전의 경험들 없이는 쉽게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같이 시작한 22명의 동기 중, 로펌 1년 차 때 일을 그만둔 동기 다섯 명 중 네 명은 우리 로펌이 첫 직장이었다.
"진로 결정"이라는 자주 쓰이는 단어는 사실 정말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내 앞에 어떤 길들이 있는지 알아야 하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나왔다면 현실적으로 나에게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가? 사람을 자주 만나는 직업이어야 하는가? 나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나는 오히려 즉흥적인 상황에서 훨씬 더 빛나는 사람인가?
나의 20대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절대로 책상 앞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섭고 두려워도, 일단 도전해 보라고 하고 싶다. 실패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경험 이어도 무언가는 얻을 것이다. 관심 있는 분야지만 월급이 낮아서, 현실적으로 다 괜찮은데 관심 없는 분야라서, 생각했던 것보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의 스펙이 안돼서, 밤늦게까지 일해야 할 것 같아서 -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들 때문에 그저 머릿속의 상상으로 그 모든 기회들을 증발시키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한마디 던졌으면 좋겠다.
눈 딱 감고, 하기나 해 (just do it).
불안하고,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살짝 설레는 지금 이 순간을 추억하며 당신이 10년 뒤에 이렇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때 나, 정말 용기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