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다시 공부합니다 02 - 차근차근, 매일 조금씩
대학교 때 내 룸메이트는 민사고에서도 성적이 좋았던 친구였다. 그 친구랑 나는 공부하는 성향이 정말 비슷했었는데, 그 친구와 같이 방을 쓴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쯤, 정말 놀랐던 경험이 있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이 시험 날짜가 있다면 정말 한 달 전부터 공부하는 스타일이어서 서로 얼마나 매일매일 충실하게 수업 진도를 따라가며 따로 시험공부도 미리 했었는지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그 친구가 스페인어 시험을 치기 하루 전 날, 나에게 "오늘은 아마 기숙사에 안 들어올 거고 도서관에서 밤새고 시험 보러 갈 거야"라고 말을 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근데 너 이미 준비되어있지 않아? 계속 시험 준비하고 있었잖아"라고 물었었다. 거기에 내 친구가 했던 답은 아직까지 잊히지가 않는다.
"나는 아무리 준비되어 있어도 시험 전날은 항상 밤새서 공부하고 갔어."
고등학교 내내 나름 노력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대답이었다.
그 대답 이후 나도 뭔가 "어? 그럼 나도 그래야 하는 건가" 싶어서 시험 전날 밤을 새보려고 했으나 나에겐 그게 절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착실하게 매일매일 끙끙대며 공부하는 노력파 학생들에게도, 미묘하게 다른 공부 스타일과 습관들이 있다는 것을 대학교 때 여러 친구들을 만나며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어떤 시험에도 밤을 새운 적이 없다. 내 뇌는 컨디션을 타는 스타일이어서, 확실히 그 전날 4시간 이상은 자야 시험장에서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생에서 가장 잘 본시험 아침엔, 시험 들어가기 몇 시간 전에는 내 몸안에 "잠"이 덜 채워져 있다고 느껴져서 오후 1시에 있는 시험을 위해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오전 10시까지 공부하다가 기숙사 침대에 다시 누워서 두 시간 더 잠자고, 30분 더 공부한 후 시험장으로 들어갔었다.
어쨌든 그 친구도 그 친구대로, 나는 나대로 우린 우직하게 맨 땅에 헤딩하듯 요령 없이 공부했다. 그리고 지금도 요령 없이 공부하고 있다.
내 기준 "요령 없이 공부한다"는 것은 아웃풋에 비해 인풋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F 맞는 게 두려워서 공부하다 보니 A를 받는 케이스였다. 주변 학생들이 대충 10시간 공부해서 B+나 A-를 받는다면, 나는 사실 50시간을 공부해서 A를 받는 케이스였다는 것이다. A를 받고 싶었다기보다, 나 자신을 못 믿었다. 내가 다른 학생들처럼 10시간 공부한다면 나는 B+가 아니라 C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 "인풋"이라는 것을 잠시 내가 로스쿨에서 시험을 준비했던 과정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로스쿨은 모든 과목이 학기 말에 open-book시험이 성적의 100%가 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즉, 학기 내내 무엇을 배웠든, 수업태도가 어땠든, 일단 학기 말에 보는 4시간의 서술형 시험이 그 과목의 전부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모든 과목이 open-book형식으로 진행되는데 그 말은, 시험장 안에 뭐든지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디지털화 되어있지 않은 모든 것을 가져가서 봐도 되는 게 룰이었다 (디지털 형식은 인터넷, 그리고 컴퓨터 안에 저장되어있는 노트나 아웃라인을 뜻한다. Ctrl+F 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룰이다).
사실 말이 오픈북 시험이지, 내가 가져가는 것이 별로 도움되지는 않는다. 답은 시험지 안에서 찾아야지, 내 노트에서 답을 찾고 있는 순간 그건 시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로스쿨 시험은 보통 fact pattern이라는 어떤 시나리오가 주어지는데, 보통 문제 하나 당 그 시나리오를 담은 스토리가 한 페이지 정도 된다. 그 시나리오를 읽으며 학생들 머리에는 시험지에 무엇을 쓸지, 그리고 어떻게 쓸지, 답이 바로바로 떠올라야 한다. 가지고 온 노트 (outline이라고 한다) 그 답을 쓸 때 조금 더 세밀하게 써야 할 때를 위해 사용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언급하고 싶은 그 판례가 내 노트 어디에 있는지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지) 답을 찾기 위해 노트를 뒤적거리고 있다면 그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시험에 관해 조금 더 얘기하자면, 보통 처음 30분은 시험지를 읽고 생각하는데 쓰고, 다음 3시간 30분은 미친 듯이 노트북을 두들기며 타자를 하며 답안지를 작성한다. 보통 12-16 페이지 정도가 되는 답안지가 나온다
이런 4시간짜리 서술형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모든 학생들에게 추천되는 방법이 있고, 그 방법이 맞지 않는 학생도 있겠지만 나 포함 대부분 학생들이 쓴 방법이 "아웃라인 만들기"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가는 건 잘 만들어진 나만의 아웃라인 하나면 된다--라는 것이다.
사실 학기 내내 아웃라인 만들기는 정말 어렵다. 일단 처음 한 달은 가족에 법조인이 있지 않다면 웬만한 과목은 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처음 한 달은 정말 예습하기에도 벅차다. 여기서 예습이란, 다음 수업에 배울 케이스들을 미리 읽어놓고 정리해서 가는 건데, 케이스 자체가 복잡하고 쓰는 언어도 어렵고 판사들이 하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수업에서 교수님은 누군가를 지목해서 수업 내내 그 케이스에 대해 물어볼 것이고, 어느 정도 준비를 해가는 것이 예의라고 느끼는 게 대부분 학생들인 것 같다. 물론, 대답을 전혀 못할 정도로 준비를 못했다고 해도 성적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니 예습을 아예 안 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내가 3년 내내 다니는 동안 그러는 경우는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고, 그것도 학생이 정말 정중하게 "교수님, 정말 죄송한데 어제 갑작스럽게 가족에게 일이 생겨서 다녀오느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얘기했었다. 적어도 내가 다녔던 로스쿨에서는, 예습을 어느 정도 해가는 게 교수님에게도, 그 수업을 참여하는 모든 학생들에게도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야기가 여기저기로 새는데, 이렇게 한 달 반쯤은 다음 수업을 위해 예습하는 시간을 60%, 복습하는 시간을 40% 정도 썼던 것 같다. 여기서 복습이란 그날 교수님이 클래스에 했던 말을 적었던 노트를 나중에 내가 봤을 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한 달 반쯤 보내고 나면 케이스를 읽고 이해하는데 스피드도 생기고 예습할 때도 "무엇을" 예습해야 하는지 감이 생겨서 예습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러면서 시작되는 게 바로 "아웃라인 만들기"이다.
아웃라인 만들기는 쉽게 말해서 "노트 정리"이다. 한국에서는 "한 권 만들기"가 한동안 공부법으로 유행했던 것 같은데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하나의 워드 문서로 쫙 정리하고, 그걸 프린트해서 시험장에 가져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웃라인 만들기이다. 보통 수업 노트 자체가 300페이지에서 500페이지가 되고, 아웃라인은 그것을 100페이지 밑으로 줄인다. 사실 여태 들었던 수업 노트 자체를 다시 읽고 정리하는 게 공부가 되고, 그 정리된 아웃라인을 시험 전에 적어도 10번 보는 게 나의 목표였다 (아쉽게도 이게 지켜진 과목이 많지 않다. 시간이 정말 부족한 곳이다, 로스쿨은).
위에 나와있는 그림 1은 Civil Procedure이라는 과목의 노트를 무려 줄인!! 노트들과 아웃라인을 합친 양을 보여준다.
그림 2는 500페이지가 넘는 수업노트를 다시 쭉 읽으며 깨끗하게 정리한, shorter notes이다. 이게 마지막 페이지인데, 252페이지에 끝난다. 사실 일 학년 때 Civil Procedure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다른 과목을 오히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솔직히 작명 센스가 너무 떨어져서 조금 부끄러운데 시간이 너무 없는 나머지 처음에 "RERENOTE"라는 식으로 이름을 붙이면 그냥 그렇게 노트 자체가 프린트되는 것 같다 (여기선 한국어로 쉽게 리리노트... 라고 부르겠다). "Shorter Notes"를 다시 정리한 리리노트가 나의 아웃라인이었고, 이 리리노트가 완성된 다음엔 시험날짜까지 계속 이 리리노트를 읽으려고 했다.
물론 한 번에 이해될 수 있게 나만의 스타일로 아웃라인을 만드는 것도 나에겐 중요했다.
그림 5에서 보이는 것처럼, 리리노트, 즉 나의 아웃라인은 96페이지로 끝났다.
그리고 나는 아웃라인을 읽고 끝내지 않고, 아웃라인을 읽으면서 한눈에 들어오는 페이지들 몇 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림 6과 7에서 나오는 것처럼 케이스 차트도 만들었다.
사실 Criminal Law 과목을 위해 만든 내가 제일 좋아하고 예쁘게 만든 차트가 있었는데, 최근에 집을 정리하며 버렸다. 이 글을 쓴 후, 여기에 나와있는 아웃라인과 노트들 또한 모두 버릴 예정이다.
여기서 한 번 짚고 가고 싶은 건, 이런 과정을 한 학기에 네 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다닌 로스쿨은 8월 중순에 시작했는데, 보통 11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모든 수업이 끝났다. 시험기간은 12월 첫 주 월요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말은 고작 9월, 10월, 11월 딱 세 달 안에 예습-복습 과정을 계속하며, 어느 순간부터는 깨어있는 모든 순간 4과목의 아웃라인을 만들기 시작하고, 11월 마지막 2주 정도는 그 아웃라인들을 다듬으며, 클래스가 끝나는 순간부터 계속 아웃라인을 읽고, 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재미없는 내용을 여기까지 읽은 대단한 분들에게 한 가지 다시 언급해야 하는 점은, 모두가 이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정도 하는 학생은 나밖에 없었을 수도 있고, 나보다 훨씬 더 쉽게, 그리고 효율적이게 공부한 학생들도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이 정도까지 했던 이유는, 이게 내가 아는 "최선" 혹은 그 최선 가까이 어디쯤 이여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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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이 된 이후부터는 나도 시험장에 무엇을 가져가야 하는지 어느 정도 나만의 스타일이 생겼는데, 여기서 보여주고 싶은 과목이 Evidence다. (참 신기하게 나는 M&A를 하는 자문변호사인데도 로스쿨 때 가장 치열하게 공부했던 과목들은 소송 변호사들에게 도움 되는 civil procedure과 evidence였다).
그림 8에서 보이는 것처럼 Evidence 아웃라인은 총 104페이지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말 시험 보기에만 필요한 것들은 추려서 이렇게 고무줄로 묶었는데, 생각보다 바인더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보다 이렇게 고무줄로 묶는 게 시험 볼 때 휙휙 넘기기에 좋았다.
마지막으로, 사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들은 언제든지 다시 프린트할 수 있는 워드 문서로 저장되어있는 노트들이 아니라, 이렇게 그림 10에 나와있는 공부의 흔적들이지 않나 싶다. 이건 Evidence 시험 전, 스스로 얼마나 준비가 되어있나 아웃라인의 도움 없이 휘갈겨 쓰며 정리를 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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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그리고 로스쿨 입시 시험 LSAT을 공부했던 때와 로스쿨을 다니던 시절 내내, 나는 요령을 모르는 학생이었다. 시험을 본다고 하면 시험에 나올 만한 모든 정보 (수업 노트, 교과서, 그리고 그 외에 해당되는 모든 것들)를 일단 다 펼쳐놓은 뒤, 차근차근 그러면 어떻게 이 정보들을 시험 당일까지 내 머리에 쑤셔 넣을 수 있는지 계획을 짰다. 그리고 계획이 세워졌다면, 매일매일 그 계획을 지키려 노력했다.
물론 그렇게 공부했던 양에 비해서 시험에 나오는 건 아마 20%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노력하는 내내 힘들지 않았다. 다른 애들이 주말마다 파티를 가든, 술을 마시러 가든 신경 쓰지 않고 도서관에서 내 자리를 지켰다. 내 성향이 이런 것도 크지만, 내가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그다지 비교하지도, 억울해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노력이 나를 가장 뿌듯하고 행복하게 만들었던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