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1일에 쓴 글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로스쿨 1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 이후 가끔씩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게 그냥 단순히 생각나는 게 아니라 약간 서글프고 가슴 한 켠이 미어지는 감정이라서 그럴 때마다 나 자신에게 나도 놀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미국에서 자란 나는 사실 할아버지를 “보고 싶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자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할아버지랑 친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자하고, 따뜻하고, “허허허” 웃으며 손자 손녀들과 편안하게 지내는 할아버지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동생과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면 우리에게 별 말도 없으셨고, 소파에서 뛴다고 한 소리 하신 이후로는 그저 가장 무섭고 눈치 봐야 할 존재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런 할아버지와의 여러 추억들은 다 따로 노는 조각 같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나—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 온 뒤로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렸었는데 그때마다 우리 가족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꽤 오래 머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동생과 나는 할게 별로 없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하곤 했는데 그 노래방 기계가 워낙 오래된 거라 최신 노래가 업데이트 되어있지 않았었고 나는 그 기계에서 찾을 수 있는 최대한 “최신”이었던 SES나 핑클 1집과 2집 정도의 노래들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꽤 예전 노래인 (그래서 노래방 기계에서 찾을 수 있었던) “당돌한 여자”라는 노래를 알게 되어서 그걸 불렀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때 “그래 그 다른 노래들 말고 이런 노래를 불러”라고 말하셨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아파트의 소파의 구조, 할아버지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아마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나한테 직접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듯한 말을 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 이제 와서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아직도 당돌한 여자를 듣거나 노래 부르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렇게 서먹하던 할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처음으로 바뀌었을 때는 내가 대학교 들어가기 바로 전 여름에 한국에서 작곡/미디를 배우기로 했을 때다. 그 여름 나는 할아버지께 성경책을 읽어드린다는 목적으로 주말마다 보령으로 내려갔는데 할아버지는 성경책은 공감이 안된다고 신문이나 읽어달라고 했었다. 그래도 매 주말 토요일 오후, 할아버지는 그 좋아하시던 모임을 포기하고 내가 누를 초인종 소리를 기다리셨다. 그러다가 나는 콘서트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 주말에는 보령으로 내려가지 못했는데, 그 이후 토요일 오후에 도착하면 할머니가 할아버지는 모임에 가셔서 저녁에 도착할 거라고 얘기해주셨다. 급한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건강 문제도 아니고 콘서트 때문에 못 내려간다는 게 서운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 더 가까워진 후 대학교 가서는 편지를 꾸준히 보내드렸다. 사진까지 프린트해서. 돌아가시면서 그 편지들을 그렇게 아끼시던 것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나에 대한 관계를 설명하자니 글이 길어졌는데, 나에겐 할아버지와의 기억 중 가장 강렬한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교 졸업을 하고 여름 동안 중국에서 선교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국에서 한 달 정도 엘셋을 공부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두세 달 안에 엘셋 공부를 다 끝낼 목표로 할머니 할아버지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독서실에 등록했었는데,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7시쯤에 돌아오곤 했다. 할아버지도 모임이 있으시고 나도 항상 같이 점심을 먹기에는 집중이 흐트러질 것 같아서 월-금 중 이틀 정도만 같이 점심을 먹었었다. 지금 얘기하면 좀 부끄럽지만 그때 12시에 같이 먹자고 아침에 얘기하고 12시에 맞춰 아파트에 오면 할머니가 요리하고 내가 옆에서 조금 돕고 그러다 우리가 다 같이 먹는 건 30분 후였던 게 그렇게 시간이 아까웠었다. 생각보다 엘셋 공부가 힘들어서 불안하고 초조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늘은 피자를 시켜먹자고 하셨고 12시에 먹자고 하셨었다. 나는 당연히 피자를 12시에 시키실 것 같아서 일부러 조금 늦게, 한 20분 정도 늦게 아파트로 갔었다. 그런데 이미 피자가 와 있었고 알고 보니까 할아버지가 내 공부시간을 생각해서 12시까지 피자가 배달될 수 있도록 맞춰서 시키셨던 것이다. 그때도 너무 죄송했는데 특히 이 기억은 생각날 때마다 그 감정이 진해지는 것 같다. 너무 후회되고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예상 밖의 할아버지의 배려여서 그런 걸까. 놀라움, 고마움, 미안함 이 모든 감정이 공존하는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해 여름 내 공부시간을 할아버지가 배려하는 순간들이 더 떠오르는데 일단 여기까지 해야겠다. 나한테 콩국수도 먹여보시고 추어탕도 가르쳐주셨는데. 그 까탈스럽고 매사에 불만 많으셨던 분이 나한테는 "오늘은 갈비탕으로 잘 챙겨먹어"라며 만원 씩 쥐어주실 때가 있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슬퍼진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로스쿨 도서관에서 저녁에 공부하다 들었었는데, 이 세상에서 나를 확실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한테 더 잘해줄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졌다는 게 소화하기 힘들었다. 편지에는 썼어도, 할아버지 눈을 바라보며 정말 진심 담아 사랑한다고 그리고 할아버지도 나 사랑하는 거 안다고 얘기하지 못한 게 아직도 후회된다.
이런 얘기의 끝은 항상 그렇듯—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장 슬픈 작별인사를 언제 하게 될지 모른다. 할 수 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말, 그 사람이 들었으면 하는 말 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