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시 - 그때가 좋았어
뉴스에서는 올해가 가장 춥다고는 하지만, 작년 이맘때도 이번 못지않게 추웠다. 눈은 떨어지듯 바람을 타며 날아가고 길거리엔 수많은 인파가 흘러간다.
너와 함께 있을 땐 그 인파 중에서도 우린 특별했었다. 세상엔 너와 나 그리고 사람들뿐이었다. 드라마 같았다. 우린 극 중의 주인공이고 그 외에는 모두 조연과 엑스트라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최종화를 마지막으로 드라마가 끝나겠지만, 그건 먼 일이라 생각했다.
오늘이 어제가 된다. 12월이 1월이 되고 내년이 올해가 된다.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된 우리에겐 더 이상의 궁금증이 필요하지 않았다. 만나서 스마트폰을 만지면 괜히 심술 부리던 우리도 옛날이야기다. 더 이상 우리에겐 작은 설렘조차 욕심이었다. 그렇게 눈 내리는 무대에서 우리는 점점 조연이 되어간다.
따뜻했던 커피가 다 식어가서야 한 모금 마신다. 우린 서로 친한 친구 같았다. 연인이라기엔 뜨겁지 않고 그저 아는 사이라기엔 서로를 너무 많이 알았다. 무서운 영화를 싫어하고 매운 걸 좋아하며 소주보단 맥주, 카페에선 항상 아메리카노. 어느덧 익숙함이 스포일러가 되었다.
방전된 배터리처럼 결국 우리는 꺼졌다. 우린 너무 익숙하니까, 만나봤자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이며 무엇을 할지 알고 있다. 너와 난 덤덤했다. 이런 결말마저 예상한 것처럼.
헤어지고 첫날은 괜찮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둘째 날엔 혼자인 나를 만나고 셋째 날엔 지난날의 그때를 생각하며 웃음 지었다. 눈꼬리와 입꼬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내 안에서 커져가는 너를 다시 마주하며 또 다른 오늘을 맞이한다. 그렇게 다 꺼져가서야 남아있던 불씨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바보처럼 네가 생각나고 자주 가던 거리의 냄새와 소음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때 알았더라면 더 사랑할 걸, 더 안아줄 걸 후회가 된다. 매일매일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너의 번호는 지웠어도 난 기억하고 있다. 한참을 고민하다 통화버튼을 누른다.
오늘 저녁이나 먹을까.
서로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약속을 잡는다. 나름 꾸미고 그곳으로 간다. 우린 이 곳에서 안녕으로 만나 안녕으로 헤어졌다. 너도 그럴까, 나에겐 이 곳이 그래서 남다른 공간인데.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가벼운 웃음,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 지금 너와 나의 관계를 제외하곤 모든 게 같았다.
전에는 못 느꼈던 유리창의 한기가 오늘따라 시리게 느껴진다. 잠깐의 침묵 끝에 너에게 솔직히 말했다. 다시 만나자, 사실 고백이라기엔 통보에 가까웠다. 말을 꺼내고 나서 너의 난처한 눈빛을 보며 알았다. 넌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애였으니까. 머쓱해하며 창 밖을 내려다봤다. 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우린 저 인파 중의 하나가 된다. 추운 바람에 옷깃을 부여잡고 빠르게 걷는 행인이 되어 버릴 것이다.
다시 한번 안녕을 말한다. 감기 조심하라는 서로의 무게감 없는 걱정으로 뒤돌아선다. 아메리카노는 쓴 맛에 먹는 거라며 인생을 비유하던 너의 농담에 수긍이 갔다. 헤어진 게 인생의 큰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볍거나 달달하지는 않았다. 서둘러 너에 대한 마침표를 찍는다. 그래야만 나를 격려할 수 있으니까.
최대한 정신없게 지냈다. 그렇게 견뎌내보니 어제와 오늘의 차이는 나뭇잎의 색과 사람들의 옷차림뿐이었다. 늦가을 어느 날, 너에게서 연락이 온 것 만 제외하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익숙한 말투. 반가웠지만 의아했다. 무슨 일로 전화했을까. 행여 끊길까 숨을 고르고 통화버튼을 누른다.
밥 먹었어?
이유 모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린 헤어져서도 레퍼토리는 비슷했다. 세 번의 사연이 있던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내가 했던 이야기를 네가 하고 너의 답변이 내 입에서 나왔다. 이제야 정리하고 마침표를 찍었는데. 다시는 생각지 말자며 다짐했건만 너의 물음에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복잡했다. 네가 미웠다. 왜 이제야 나를, 왜 우리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걸까.
미안하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더 이상은 마음이 답답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페를 나오며 말 한 안녕이라는 한 마디, 그게 전부였다. 우린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간다. 추위에 옷깃을 부여잡으며 걸음을 빨리한다.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 안녕이라는 걸 서로는 말없이 깨달았다.
봄처럼 따뜻했던, 너 하나로 충분했던 그 드라마가 끝이 났다. 두 번의 연장 논의는 무산됐다. 이젠 정말 끝이다. 서로의 물음에서 우린 끝내 답을 찾았다. 비록 너와 내가 바라던 답은 아니었지만.
너와 나는 주인공인 줄 알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서로의 갈등 끝에 해피엔딩일 줄 알았는데, 그저 종영한 드라마의 퇴장하는 조연이었다. 그뿐이었다. 우리라고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생각이 난다. 하지만 간절하거나 슬프지는 않다. 모호한 생각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지고 만다. 서로의 엇나간 타이밍에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젠 끝이 났으니까, 생각을 접고 옷깃을 부여잡으며 길거리를 지나간다. 네가 아닌, 사랑했던 우리를 그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