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해가 지는 시간도 늦춰진다. 전엔 5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지더니 이제는 집에 가기 싫은 아이마냥 저기 산 중턱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유난히 길던 겨울도 들어가나보다.
우리가 사랑했던 날들 위로 바람이 불어온다. 매번 차갑게만 느껴졌는데 이젠 그 추위도 힘을 잃어가나보다. 추운 겨울이 끝나면 따뜻한 봄이 오듯, 우리 둘의 사랑이 지고 봄이 오려나보다.
오늘은 퇴근하면서 초밥을 먹었다. 맛있었다. 너와 같이만 왔던 그 집이다. 물론 처음엔 다 어색했다. 울리지 않는 스마트폰과 1인분의 식사 그런 것들이 전부. 코끼리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코끼리가 그려지는 것 같이, 생각말자 하던 마음가짐도 다 필요 없었다. 그냥 생각을 안 해야 너가 떠오르지 않았다.
매번 똑같이 처음에는 힘들었다. 그런만큼 이별한 남녀의 감정은 뻔했다. 너 하나면 될 줄 알았는데, 변한 너가 속상하고, 무심하게 돌아선 너에게 화가나고 그런 뻔한 표현들. 그리고 경험해봤으니 이젠 괜찮겠지 라는 안일한 준비도 이젠 식상하다.
어젠 아는 선배가 너의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냐고, 요즘 싸우거나 그러지는 않냐고. 이젠 싸울 일 없다고 했다. 서로 좋게좋게 마무리 지었다 말했다. 헤어짐에 좋게좋게가 어디있겠냐마는 지금은 별 감정 없으니, 이 정도면 좋게좋게 헤어진 게 아니겠는가. 그러자 선배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난 정말 괜찮다. 별로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매번 들어맞았다. 헤어지고 초반엔 항상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한숨 내쉬었지만 결국엔 인정한다. 이젠 시린 바람에 떨지 않는다. 하루하루 지나며 기온도 살짝 오른 것 같다. 시나브로 변해감에 나도 모르게 담담해졌다.
이젠 슬프지않다. 그렇다고 기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아무 감정이 없다. 정말 별 감흥이 없다. 수능만 보고 달려온 고3의 감정이나 기다리던 군 복무를 마친 예전의 내가 느낀 그 감정과 얼추 비슷하다.
그래서 난 오늘도 반쯤 멍한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건조한 오늘을 마친다. 점차 풀려가는 이 날씨에 썩 만족하며 집 앞 벤치에 잠깐 앉는다. 너도 나와 마찬가지일까. 아니, 그냥 생각을 말자. 지금 딱 이 상태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저 그런 때니까.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