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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Nov 06. 2021

03. 찬밥, 더운밥

-프리랜서 편집자의 일감 선택하기

통장 잔고가 줄어든다


그렇다. 사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자발적 퇴사라서 실업급여가 없다. 실업급여라도 받았다면 실업을 연착륙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바로 외주 일을 시작해야 했다. 독일처럼 자발적 퇴사도 실업급여를 지급해주면 어떨까 싶다. 여하튼 처음 계약한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미리 계약한 일이 없었다. 이제 프리랜서가 되었다고 알리고 안면을 튼 출판사 편집자들에게 외주 업무를 달라고 연락해야 하나 고민을 할 때였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평소 친분 있던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 작업 의뢰였다. 의뢰한 원고에 대한 내 생각과 원고를 맡아서 작업해줄 수 있는지 여부였다.


출판사 편집자의 업무 중 하나는 원고 검토하기다. 출판사마다 업무 방식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원고 검토를 담당해야 한다. 대표가 받아서 온 원고도 있고, 출판사 투고 메일에 온 원고도 있다. 기존에 작업했던 저자의 지인의 원고도 있고, 저자의 후속작 원고도 있다. 투고 경로와 성격은 다르지만 출간 원고는 검토해야 한다.


십입시절부터 투고 원고를 검토하는 일이 참 어려웠다. 출간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일이니까. 물론 출간 결정은 내 의견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나도 편집자로서 출간 여부에 대한 의견을 내야 했다.


퀴즈쇼에 참가한 도전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미래를 점치는 점술사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마지막은 구형을 내리는 판사처럼 냉정해야 한다.


당연히 누가 봐도 출간해야 할 원고를 검토할 때는 신이 났다. 어떻게 이 원고를 책으로 만들지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그 기분. 대표에게 꼭 출간해야 한다고 말할 때 높아진 내 목소리, 빨리 이분에게 계약 소식을 전하고 싶은 내 손가락. 모든 것이 즐거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거절해야 할 때는 괴롭다. 냉정해야 하지만, 열정을 쏟으면서 글을 쓴 모니터 너머의 그분에게, 차마 말을 전하기가 힘들 때도 있었다. 차츰 출간 경험이 쌓이면서 원고 검토가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원고를 검토하고 출간 거절을 이야기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대표님이 보내주신 원고를 살펴봤다. 나는 당연히 일이 필요했고, 평소 좋아하는 출판사라 선뜻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원고를 보니, 음… 글쎄. 나는 다시 괴롭기 시작했다. 좋은 저자이고 의미 있는 글이었으나, 내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온전히 이 원고를 안을 수 있을까


맞아,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하다가

프리랜서니까 좀 가려도 되잖아하면서

내 안의 무수히 많은 나와 대화했다.


격렬한 고민 끝에 나는 이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비를 맞아도 되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도 되지만  불안해하지 않고 이 비가 그친다고 믿기로 했다. 당장 이 원고를 계약하지 않으면, 일이 없을 것이라는 불안을 제쳐뒀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결정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작업을 의뢰해준 대표님에게 메일을 썼다.


정중하게, 또 감사한 마음으로.

거절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보내기까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메일을 보내고 난 뒤 마음이 개운해졌다. 우습지만,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 무수히 많은 비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또 결정해야겠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삶에서 칼과 방패 모두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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