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 쓰지 않고 원고 마주하기
반가운 봄비가 왔다. 마른땅을 적시기에는 부족하지만이제라도 와서 다행이다. 며칠째 산을 붉게 태웠던 불길도 잠잠해졌다고 하니, 정말 모두에게 고마운 비다.
그동안 나는 코로나 확진으로 딸과 긴 격리 기간을 보냈다. 남편만 음성이라서 우리는 안방에서 생활했다. 밖에 못 나가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집안일에 완전히 해방돼 책도 읽고 컴퓨터도 하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반강제적으로 가지게 됐다.
프리랜서 이후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고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못했다. 지난가을에 계약한 책을 아직도 작업하고 있다. 이유는 책 분량이 670쪽이며, 학술서이며, 각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부속 작업까지 할 일이 참 많기 때문이다. 정말 중간에 작업할 때는 너무 지쳐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다. 책상에 원고는 계속 쌓여 갔고 교정지 횟수도 늘어났다.
이제 수정할 내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재쇄 교정지를 보면 또 틀린 내용이 나왔다. 쉼표, 띄어쓰기들을 맞춰가면서 나를 탓하기도 했다.
'왜 전 교정지에는 이걸 못 봤지'
'나는 왜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하지'
'아직도 편집자가 아닌가'
나는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했다. 딸이 유치원에 있는 동안 일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하는 건 무리였다. 지난번 무리하게 두 권을 진행했다가 책은 책대로 힘들었고,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어했다. 그때 나는 살이 많이 빠져서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일은 하고 있는데 당장 수입이 생기지 않는 이상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마지막 보루였던, 퇴직금을 해지했다. 이 책 작업비는 이미 받았지만 책 작업 기간이 조금씩 늘어났고, 이 상황에서 다른 일을 병행하기가 힘들었다. 퇴직금을 해지하고 나니 마음은 아팠지만 오히려 편안해졌다. 부족한 나를 다독이며 이제 이 원고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에 이런 글이 나온다.
글보다 삶이 앞설 수 없다고, 나는 이 말을 늘 마음속 깊이 새긴다.
웃으면서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