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는 오래된 교회가 있다. 내가 다섯 살 적에도 벽돌과 벽돌이 바래진채로 쌓여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이 곳의 목사님이 누구인지, 수녀님은 계시는지, 다니는 사람은 누구인지 모른다. 예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은 교회. 있다가도 없는 것 같은 공간이 선명해졌다. 고양이와 닭장 때문에.
교회에는 닭장이 있다. 제주도 담장 같은 벽돌 담장 한 켠에 닭을 키운다. 닭을 키우면 보호자를 넘어 보디가드같은 심정이 된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고 아닌 밤중에 삵이 닭을 잡아 채가기도 하니까. 닭은 항상 쫓겼다. 일상 속 굶주린 맹수는 도처에 널려있었다. 교회는 보디가드의 심정이라고, 보름달이 밝은 밤에 지나치며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산책 중이었다. 있어도 없는 듯 무심히 교회를 지나쳤다. 햇빛이 십자가 위로 쏟아지고 청량한 공기가 담장 위 넝쿨을 흔들고 있었다. 고양이가 있었다. 닭장에서 열 걸음 정도 거리에 고양이가 있었다. 까만 새끼 고양이와 삼색의 어른 고양이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등을 비비고 있었다. 청바지에. 무릎에. 노란 머리를 살곰 묶고 무릎을 굽혀 앉은 여자에게.
이사하기 전에 발품을 팔면서 꼭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이 있다. 지인이 말하길, 그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인지 알려면 아이들이 뛰어노는지, 길고양이들이 보이는지, 살이 쪄있는지를 보라고 그랬다. 고향의 모든 곳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할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는 고양이가 드문드문 보이고 살이 쪄있었다. 새끼들의 털이 윤기나고 어미 고양이는 졸린 듯 꿈뻑거리며 늘어져있는 광경을 자주 보았다. 좋은 곳이구나, 좋은 곳이야.
아무렴. 닭장과 고양이를 함께 보살피는 곳. 유토피아가 있다면 이런 곳이지. 그때부터 교회는 예수나 목사의 감명 깊은 언어보다 한 순간의 광경으로 선명해졌다. 눈을 통해 시신경에, 해마에 저장되고 혈관을 타고 심장을 돌아 마음에 새겨졌다. 피그말리온이 이상적인 여인을 조각했을 때의 섬세한 열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