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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Oct 09. 2020

우린 우주가 된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차를 탔다. 차를 타는 것은 어릴 적의 나에게 큰 낙이었다. 뒷좌석의 정중앙에 앉아있길 좋아했기 때문이다. 조수석엔 오른손을 운전석엔 왼손을 올려놓았다. 오른쪽을 돌아보면 엄마가, 왼쪽을 돌아보면 아빠가 있거나 어느 날은 왼쪽을 돌아보면 엄마가, 오른쪽을 돌아보면 아빠가 있었다. 중앙에 앉으면 앉아있기엔 불편했지만 아빠와 엄마 모두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복된 것이 들어찬 기분이었다. 그것이 사무치도록 좋았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선(최수인 역)이 중심이다. 마치 학교와 세상이라는 자동차에 올라탄 아이처럼. 모두에게 그렇듯이 선이에게 도 세계가 있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세계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선이의 마음은 확장된다. 나는 카메라 숏의 크기와 프레임 속 인물들의 위치에 따라 <우리들>에게 닿고 싶었다.











선이의 세계

-나와 너는 멀리, 혹은 가까이


  <우리들>은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 즉 미디엄숏, 클로즈업 숏, 롱 숏으로 선이와 상대 인물과의 거리감을 나타낸다. 선이에게 카메라가 머무는 시간도 몇 초 더 길다. 지아와 선이 함께 달려가도 선이를 먼저 잡거나 오래 잡는 것처럼. 놀이터에 뛰어들어가는 씬, 방방에서 노는 씬, 문방구에서 지아가 색연필을 훔치는 씬 등 카메라는 선이를 따라간다. 지아가 프레임에서 반쯤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지아를 만나 생기발랄해진 선이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때 선이는 지아를 만나 기쁘기도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선이가 영악한 면모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좋다. 마냥 해맑고 행복하다. 반짝거리는 시간일 것이다. 영화는 빛과 색감으로써 선이의 이런 마음을 탁월히 표현하고 있고, 아직은 지아가 선이에겐 온전하고 동등한 입장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같이 있으면 즐거운 친구이다. 카메라가 초반에 철저히 주인공 중심적인 이유는 선이가 변하고 난 후 카메라 속 인물 간의 관계도 변하는 것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다.


  <우리들>은 특정 짓는 인물과 특정 짓지 않는 인물이 명확하다. 보라의 집을 찾아갔더니 나온 낯선 남자나 문방구 아저씨, 학원 선생님, 할아버지처럼 아예 나오지 않거나 목소리만 나오거나 한 번만 나오는 사람을 '특정되지 않는 인물'이다. 죽을 수도 있고, 어디에나 있고, 갑작스럽고, 지나가는 사람처럼 선이에겐 지속적이지 않은 인물들이다. <우리들>에서 특정 인물은 주로 엄마, 동생, 아빠, 지아, 지아 할머니, 보라, 보라친구들, 선생님 등이 있다. 선이의 세계에서 드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지속적인 인물이다.


  특정 인물들과의 거리감은 중요하다. 시각적으로나 은유적으로나. <우리들>은 실제 감각을 이용해 카메라의 의도적 거리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써 자연스럽게 인물에게 느끼는 마음의 거리감을 표현한다. 쉽게 말해, 인물이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간다거나 멀어지는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영화 속 공간을 이용해 선이가 거리감을 느끼는 인물은 멀리서 놀고, 선이가 친근함을 느끼면 선이의 가까이서 논다. 선이를 중심으로 인물들은 움직인다. 공전하기도 하고, 혜성처럼 지나치기도 한다. 그러면 선이는 행성일까. 아니면 수 많은 행성 사이를 헤매는 혜성일까.  


  초반에 선이는 행성이다. 지표 없이 멋대로 멀어지는 혜성들은 잡을 도리없이 흘러간다. 지아는 선이와의 시간이 즐거웠지만 학원에서 만난 보라와 친해지고 나서는 차가워졌다. 보라는 선이가 원하지 않아도 책상 앞으로 가까워지고 위협을 하고는 휙 멀어진다. 친구들은 큰 혜성들이라 중력도 세다. 살짝 지나치기만 해도 선이라는 행성은 휘청일 수 있다. 정해진 궤도 없이 중력을 이용해 선이를 휙 끌어당겼다가 놓아버린다. 선이는 속수무책이다. 하지만 지아라는 또 다른 행성과 빙글빙글 즐겁게 공전한 추억이 있기에 선이는 용기를 낸다.


  현장체험 학습에서 김밥을 나눠먹던 장면이다. 도시락을 함께 나눠먹는 것으로 화해를 할 것만 같다. 이때 의자라는 위치에서 서로의 측면에서 오버 더 숄더 숏을 보여준다. 미디엄 롱숏으로 잡히긴 했지만 서로가 한 프레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화해의 가능성을 시각화한다. 그러나 다시 언쟁이 시작되면 점점 서로의 등과 어깨는 프레임에서 사라지고 끝내 선의 얼굴을 미디엄숏으로 마무리하며 지아가 프레임에서 나간다. 다시 지아라는 행성은 혜성이 되어 떠나갔고, 이번엔 모진 말을 하고 김밥까지 엎었다. 선이의 마음은 엎어진 김밥만큼 속이 쓰리다. 바로 다음에 피구 장면이 나온다.

  피구는 금이 그어진 공간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함께 놀이를 할 수 있고, 금 밖으로 나가면 놀이에선 한 발짝 물러나 방청객이 되어야 한다. 선이는 지아에게 일찍 공을 맞아 퇴출된다. 선이는 모진 말을 한 지아에게 섭섭하고 엎어진 김밥의 잔상이 남아있다. 이때 지아와 보라가 모두 미디엄 롱 숏이다. 선이 눈에는 보라와 지아 둘 만의 개인적인 일로 보이는 것이다. 그 순간에 사회 모순으로 인한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등해지는 숏 사이즈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로.



  <우리들>은 프레임 안에 그리드를 그려보면 가운데에 선이가 자주 있다. 누가 위치해있는지와 같이 이미지로써 선이의 마음을 표현한다. 봉숭아꽃을 물들이는 베란다 씬에서도 선이는 정 중앙 지아는 선이의 왼쪽 옆에 자리한다. 지아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자신과 또 다른 고민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자신과도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은 모르는 상태이다. 이렇듯 선이는 자주 프레임의 중앙에 위치한다. 자신 이외의 사람들의 감정에 오롯이 감화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아빠의 술병이 깨져 손이 베인 후 앉아 울 때도, 지아를 매섭게 노려볼 때도, 싸울 때도 미디엄숏으로 가까워진 채로 선이는 오롯이 가운데에 있다.


  선이는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다. 동생 이마에 붙은 밴드와 뺨을 어루만지고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김밥을 대신 싸기도 한다. 친구에게 속상해도 다시 팔찌를 만들어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들 모두 그렇듯. 자신의 생각을 다시 되짚어보는 것은 쉽지 않고 스스로가 방관자인지, 공모자인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알기 어렵다. 선이는 친구들과 재밌게 지내고, 질투하고, 화내고, 화해하고, 심각하게 싸우고 때리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럴수록 점점 지아는 선이의 세계에서 제외되었다가 갑자기 마주쳐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선이는 아버지의 등과 얼굴을 비로소 마주 본다.


 학교라는 사회 안에 약자로 특정지어지지 않으면 가해자가 되거나 약자가 되면 피해자가 되는 상황에 끊임없이 끌려다닌다. 통제할 수 없는 다수의 힘이 폭력이 되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공모하게 되는 소수가 있다.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기에 지아도 선이도 어렸고 어른들도 직시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선이는 강자 혹은 약자로 특정지 어지지 않더라도 분명 시선을 가지고 마음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이며 인격을 가지고 있다.  선이는 서서히 학교에서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라서 창피를 당했다는 것에서 아빠가 왜 술을 매일 마실 정도로 슬펐는지를 직면하고 그것을 놀림감으로 삼은 현실의 모순을 알아차린다.


  선이는 깨달았다. 동생과의 '언제 놀아?' 대화 이후 선이는 우리끼리 싸우기만 하면 언제 놀아? 우리끼리만 싸우잖아. 그만하고 노는 것만 생각하자는 발상의 전환을 마주했다. 동생의 말은 창문이 되어 선이의 마음에 환기를 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다수의 공격 앞에 확대된 마음을 봉숭아 꽃으로 물들인 손톱이 지워지듯 희석시키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피구 시간이 돌아오고, 지아에게도 금 밟았다는 힐난이 이어진다. 겪어봤던 일이고 상처 받는다는 걸 안다. 그때 행동하는 것. '그게 아니고...'에서 벗어나 '금 안 밟았어!'라고 명확히 목소리를 내는 것. 금을 밟은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쟤도 나처럼 힘들고 부당한 일을 겪었다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는 비로소 원근감이 사라진다. 지아와 선이 모두 카메라와 동일한 거리에, 프레임 안에서 동등한 비율로, 동등한 클로즈업 숏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게 선이는 지아라는 또 다른 사람으로 확장되고, 우리들이 된다.


 <우리들>로 시각적 측면에서 선이의 성장이자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혹시 다양한 폭력을 다시 겪게 되더라도 선이는 지아라는 또 다른 소행성과 빙글빙글 즐겁게 공전할 것이다. 달은 운석이 부딪혀 수 많은 크레이터들이 있다. 달끼리 네 크레이터가 못났다고 헐뜯는 것보다 지아와 선이는 너에게도 있구나, 나에게도 있어라고 할 수 있다. 의심과 서운함과 질투와 싸움이 모순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달라진다. 공전하는 두 소행성이 될 수 있다. 그 소행성들이 모여 은하를 형성한다. 은하라는 우리가 된다. 수많은 별이 된다.


 그렇게 우린 우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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