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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Oct 10. 2020

원작과 영화의 갈림길

<아가씨>와 <화차>를 다시 본 후 



  영화 「아가씨」를 다시 봤다. 「화차」를 본 직후였다. 김민희의 연기는 탁월하다. 무너진 여자의 동그란 눈빛 속 기괴한 슬픔은 정극을 뛰어 넘었다. 아무리 우아한 귀족의 영애라도, 아버지의 빚 더미를 떠 안아 조폭에게 시달리는 사람이라도, 모두 김민희를 거치면 불안과 고통의 눈동자가 우리 마음 속에 콱 들어박히게 된다. 

  활자로 가득한 시나리오가 스토리보드를 거치지 않았을 경우엔 배우와 감독의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 인지는 어떤 이미지를 선택하느냐에 달렸다. 배우는 영화 속 미쟝센에 자신을 포함하고 감독은 배우를 포함한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컷마다, 시퀀스마다 선택해야 한다. 

  변영주 감독과 김민희 배우의 선택들이 모여 미야베 미유키의 원작과는 비슷한 듯 다른 「화차」라는 영화가 나왔다. 사건 중심의 느와르 스릴러가 판을 치던 영화계에 강렬한 메세지를 보내는 영화였다. 아내가 사라졌다는 사건 중심의 스릴러이기보다 신용 불량이라는 화차에 올라 멈출 수 없을 지경이 된 차경선(김민희 역)을 통해 여자라는 약자가 신용불량 사회에 내던져졌을 때 가혹해지는 사회의 이면을 보여준다. 

  「아가씨」는 시나리오에서부터 퀴어 영화라고만 단정되지 않는 영화다. 나는 곧잘 이 영화를 탈출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특히 즐거울 땐 「아가씨」 대본과 영화를 함께 보는 순간이다. 배우들과 박찬욱 감독이 시나리오를 읽으며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나랑, 좋은데 갈래?" 하며 걸어오는 히데코의 표정을 담은 장면이다. 이것은 온전히 감독과 배우의 선택이었다. 이모부(조진웅 역)가 지하실로 데려갈 때 했던 말이다. 순진한 아이를 납치라도 하려는 것처럼 흉흉한 눈빛을 하고 했던 말을 히데코는 금방이라도 휘청거릴 것 같은 창백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서재로 함께 가자고 숙희에게 말하는 것인데. 투정 부리는 것도, 허세를 부리며 당당해하는 것도 아니다. 두려움에도 용기를 쥐어짜며 태연한 척 한다. 이렇게 연기하기로 해서, 또 이 연기를 영화에 담기로 해서 해방감은 극대화된다.

숙희와 히데코는 서재로 갔고, 히데코는 숙희에게 상처를 보여주었다. 숙희는 분노했다. 히데코를 위한 분노. 사랑하는 이를 위한 분노. 좋은 곳이 아님에도 좋은 곳으로 가자는 대사에 불안과 두려움, 상처를 표현하는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히데코의 해방과 탈출은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해, 여름 손님」에 이어 「파인드 미」를 읽으면서 감독과 배우의 선택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안드레 애치먼 작가는 이기적일만큼 파격적인 캐릭터 설정이 엿보인다. 난 성인 대 성인으로 만난다면 나이 차이는 신경쓰지 않는다. 미란다와 앨리오의 아버지가 기차에서 만나 묘한 기류를 이어갔을 때도, 앨리오와 미셸이 만나는 부분을 읽고 있는 지금도 두 배나 된다는 나이 차이보다는 다른 것이 불편하다. 미란다가 비밀을 말할 때. 앨리오가 사랑에 의존적인 모습을 보일 때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다른 아름다운 묘사와 활자들이 퇴색되어 보일 만큼 내 안의 고집 불통의 화마가 슬금 슬금 올라오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에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아니다. 많은 캐릭터를 설정할 수 있음에도 친 오빠와 오빠의 친구가 자신의 가슴을 만졌을 때 오히려 바랬다는 미란다나 어쩔 땐 지나칠 정도로 의존적인 앨리오의 캐릭터 설정이 불편하다. 위험하다, 위험해. 표현의 자유를 논하기 이전에 자신보다 어리거나 약한 존재에 대한 잘못된 판타지를 심을 때 '사랑이야'라고 한다던데. 불편하다, 불편해.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을 볼 땐 못 느꼈던 불편함이다. 「콜미바이유어네임」에선 성인이 아닌 앨리오와 올리버의 관계를 유념하다가도 영화가 내린 선택들에 의해 불편함은 미화되지도, 크게 부각시키지도 않아 앨리오와 올리버의 사랑과 망설임, 애틋함과 그리움을 퇴색시킬만큼 신경쓰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과 영화의 분위기는 비슷한 듯 다르다. 「콜미바이유어네임」은 둘의 나이보다는 감정에 더욱 집중하기로 선택했다. 영화에서 못 느꼈던 불편함을 원작에서 자꾸 느끼는 이유는 이기적일만큼 독자를, 나를, 상처주는 것은 아랑곳 않기 때문이다. 이기적으로 느껴질 만큼 잘못된 판타지를 미화한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같은 등장 인물과 같은 대사임에도 차이를 크게 느낀다. 책을 쓴 이의 선택과 영화를 만든 이들의 선택이 달랐기 때문이다. 책을 쓴 이는 성적 판타지를 미화하는데, 영화는 성적 판타지보단 캐릭터 간의 유대감에 더욱 충실하기로 했다. 덕분에 영화는 여름하면 생각나는 애틋한 사랑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콜미바이유어네임」의 속편이 기대된다. 이번엔 감독과 배우들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특히 미란다를 어떻게 표현할지. 배우와 감독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기다리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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