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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Jun 19. 2019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내겐 너무 슬픈 당신 머릿속의 지우개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자기가 자꾸 나를 속이는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직접 체크를 해야겠어"


3월 11일 남편이 불쑥 나에게 말하며 종이와 볼펜을 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며칠 전부터 남편이 내가 약을 더 주거나 덜 주는 것 같다며, 자신이 정확하게 어떤 약을 먹고 있고 어떤 주사를 맞고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몇번씩 말을 하곤 했다. 모든 약은 남편의 요구와 의사 선생님의 판단과 남편의 동의 아래  투약되고 있었지만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부탁을 드려 투되고 있는 모든 약의 이름과 용량, 시간을 프린터 해서 남편에게 가져다주었다. 간호사 선생님도 친절한 설명을 보태주셨었다. 그게 바로 하루 전이었는데...  "여보, 뽑아놓은 거 보여줄까?"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을 하며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남편은 출력물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종이하고 볼펜을 줘" 남편이 다시 말했다. 내가 볼펜과 종이를 가져다주자 남편은 진지한 표정으로 글씨를 써나갔다. "아침밥 안 먹었고, 점심밥 안 먹었고, 진통제 몇 시에 몇 번 맞았더라...."


2018년 12월에 검사한 남편의 MRI 결과지에는 두정엽에 작은 종양들이 자라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때가 3월이니 4개월 동안 두정엽의 종양은 더 커졌을 터였다. 전두엽, 측두엽과 같이 뇌의 다른 부분에도 종양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호스피스에서는 매주 한번 혈액검사와 가슴사진을 찍는 것 말고 다른 검사를 하지 않는다. 암병동이었다면 뇌전이가 심해진 것 같으니 MRI 한번 찍어보고 싶다고 내가 말을 했을지도 의료진이 권유를 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주는 게 제일 좋은 지, 앞으로 어떤 대처가 필요한 지  판단을 해보고 싶어서 MRI를 찍어보고 싶은 마음가끔씩 들기도 했다. 호스피스를 한순간 결정한 것도 아니고 몇 해 동안 준비를 했다고 했는데도 이런 때에는 호스피스로 온 게 정말 잘한 일일까 속으로 묻게 되고는 했다. 순전히 내가 알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남편에게 뇌전이는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2016년 7월 전두엽에 뇌전이가 있다는 검사 결과를 받았었고, 타그리소라는 신약 임상을 하면서 같은 해  10월 뇌전이는 기적처럼 사라졌었다. 폐암 투병 기간 동안 아주 급하게 살펴봐야 할 때가 아니면 보통 두 달에 한 번꼴로 CT와 MRI 검사를 했는데 뇌종양은 몸의 움직임, 기억, 성격 등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므로 뇌 전이 여부가 늘 신경 쓰이며 두렵곤 했다. 남편이 무얼 했는지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늘어나면서 뇌 전이가 빠른 속도로 번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우리 부인은 어디 갔나요?"

 "여보 음료수를 사 가지고 올게, 금방 올 거야 5분도 안 걸려" 언제나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고 병실 밖 문을 나서도, 늘 바쁘게 종종걸음을 걷고, 병실 문을 나설 일을 최소한으로 만들고 그 시간이 5분 이내로 매우 짧았어도 남편은 이내 잊어버리고 병실 분들에게 내가 어디 갔는 지를 물었다. 남편이 잠을 자고 있어 병실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편의점을 다녀오면 남편은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나가자마자 나를 찾으며 앉아있었다고 병실분들은 말씀해주셨다. 편의점에서 물을 사 가지고 온다고 말을 하고 갔는데도 어디에 갔냐고 "혹시 나를 두고 멀리간 아니지?" 하며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 게 무섭고 두려워서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점점 기억의 단면이 무너지고 있는 것과 두려움이 혼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약 먹은 걸 잊었고, 물을 마셨는데도 물 마신 걸 잊었다. 아이들이 왔다 갔는데도 아이들은 언제 오냐고 물었다. 어떤 때는 내가 누구인 지 잊어버리고 자꾸 존댓말을 하기도 했다. 병문안 오신 지인을 보고 인사를 했다가도 처음 보는 사람인 듯 대했다.  기억이 사라지는 게 많을수록 나에게 존댓말 하는 횟수 늘어났다. 늘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갑자기 나에게 화를 내는 순간들도 많아졌다. 나는 날마다 남편의 사진을 찍었다.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는 게 무어 좋은 모습이라고 사진을 찍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변함없이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남편의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날마다 남편에게 어제 당신의 모습과 오늘 당신의 모습이야, 어제를 살아내고 오늘을 맞이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기 위해서라도 날마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날마다 남편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기록은 선명하니까.


사실 나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2017년 7월, 통증은 너무 심했고, 하고 있던 항암은 또 내성이 왔다. 그때 호스피스로 가겠다고 남편은 말하며 사는 것처럼 사는 게 아니라고 했다. 병동 담당의사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새로운 항암을 하지 않으면 여명은 3개월 정도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의료진들이 진심을 다해 계속 용기를 주셨고 9월에 새로운 항암약을 결정하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미안해. 말 안 한 게 있었어. 사실 2개월 남았다고 했었는데 벌써 다 지나갔어, 우린 다 잘될 거야", 한달을 속 나의 거짓말. 그때  남편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 내가 그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냈어 하던 표정. 의아해하면서도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기뻐하던 표정. 초롱초롱했던 눈동자. 그때부터 2018년 12월까지. 어려운 순간들이 없지 않았지만 남편은 평안해했고, 자주 웃었고, 농담을 하고, 행복해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시간들을 감사해했다. 아이들과 힘내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 바둑을 두고, 컴퓨터 앞에 앉고, 아침마다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을 깨워주었다. 시간이 이렇게 멈췄으면 하던 순간들, 남편이 좋아 보여서 행복한 순간들이 참 많은 시절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3월 20일쯤부터  남편이 "나는 이미 죽어있는데 누군가 나를 약물로 조정하고 있는 것 같아"라는 말을 했다. 호스피스에 처음 왔을 때보다 진통제 사용량이 차츰차츰 열 배, 스무 배로 늘어났다.  다른 환자분들에 비해 통증 조절이 잘 되지 않는다며 의료진들도 남편의 통증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남편이 느끼는 감정, 통증, 그대로를 가늠해볼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너무 실감이 나서 나는 언제나 마음이 아팠다.

그쯤의 남편은 통증이 너무 심해 누워있기를 힘들어했다. 베개를 몇 개씩 겹쳐서 등에 받쳐두거나 대체로는 앉아있으려고 했다. 다리도 퉁퉁 부어서 신발을 신기도 힘들고, 걷기도 힘들어했다. 통증은 새벽에 더 심해서 새벽에 눕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서 깜빡 잠든 나를 부르며, 내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졸 수가 있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긴장을 했지만 새벽마다 한 번씩 나는 또 깜빡 졸곤 했다. 3월 28일 새벽, 남편이 나를 불렀다. 내 체력이 24시간 풀가동이 안되나 봐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아 남편을 바라보며 진통제 맞은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남편은 여전히 앉은 자세로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했는데 갑자기  "어"하는 소리를 내더니 뒤로 넘어갔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신속하게 산소, 혈압, 혈당을 체크했고 금세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무사하게 지나가나 싶었는데 몇 시간 뒤부터 눈이 너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매우 빠른 속도로 동공이 다 풀렸다.  뇌종양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은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하더니 내 뺨을 한번 어루만지고는, 자기가 나를 안아서 침대에 잘 눕혀달라고 했다. 두렵고 무서웠다. 남편의 숨소리가 나빠졌다. 하루 사이에 가래가 그렁그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변비 때문에 너무 힘들어했는데 저절로 많은 양의 변이 나왔다. 석션을 하고 뇌압 주사를 놓고 좋아질 수 있을 거야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내 주문은 힘이 없었다.  남편은 초점을 맞추지도,  혼자 힘으로 몸을 가누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고 다음날인 29일 오전에 하늘로 갔다.


"훨씬 많이 사랑하며 살걸"

남편이 투병하는 중에 내게 가장 많이 한 말 중에 하나는 훨씬 더 많이 사랑하며 살 걸, 그렇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내가 있어서 고맙다는 말도, 나 때문에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많이 했다. 내가 울지 않고 씩씩해서 자기가 용기가 났노라는 말도 많이 해주었다. 나도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자주 포옹을 했고, 하루하루 옆에 있어서 고맙다는 말도 자주 했다. 호스피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이 숨을 거두어도 2시간 정도 귀는 열려있어서 들을 수 있다고. 남편이 운명한 뒤, 연락을 받은 아이들이 시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병원에 왔다. 아빠가 아직은 들을 수 있노라고, 아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도록 꺼이꺼이 울던 나를 병동 선생님들이 도와주셨다. 한 명씩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이런 날이 진짜 올 줄 몰랐어라고 말하며 우는 막내의 말을 슬프게 새기며 나도 남편에게 아프고 아프느라 수고했다고, 힘을 내서 투병하느라 수고했다고, 아프지 않은 곳에서 이제 편안하라고, 걱정하지 말고 잘 가라고, 너무너무 사랑했다고 말을 전했다.


한동안은 남편이 하늘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지켜봐 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그런데 요즘은 남편이 우리를 지켜보면 너무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아이들 자라는 걸 다 못 보고 간 걸 너무 가슴 아파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의 기억이 하나도 남지 않았으면, 다 잊고 그냥  편안하고 행복했으면 싶어 진다. 떠나기 전 하나씩 기억을 지우던 그의 머릿속 지우개가  아픈 기억을 다 지워내고, 미안한 마음을 다 지워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도 나의 거짓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날마다 남편이 보고 싶다. 


남편은 어느날부터 어떤 약을 먹고 어떤 주사를 맞고 있는 지 기록하고 싶어했다. 남편이 기억날 수 있도록 사진을 찍어두었었다.
남편이 내게 가장 많이 했던 말 중에 하나는 더 많이 사랑하며 살걸 그랬다였다. 나는 안다. 내가 충분히 넘치게 사랑받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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