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희 Jun 12. 2019

나는 커피우유가 슬프다

당신의 슬픈 마지막 한 끼

남편은 미식가였다. 호텔에서 일하고 또 씨푸드 뷔페 점장을 해서 그랬는지,  미각이 예민해서 그랬는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특히 더 맛있는 걸 좋아했고 맛없는 음식을 먹게 되면 심하게  불쾌해했다.

식재료를 잘 알았고, 어떤 식당이건 들어가면 이 식당 상태가 어떤 지 쓱 둘러보며 파악을 했다. 뷔페에 가서 밥을 먹게 되면 한 바퀴 돌고 들어와서는 원래 그 생선이 아닌데 그 생선인 것처럼 둔갑시킨 재료로 만든 초밥이라던가 하는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어떨 땐 편했고 또 어떨 땐 신경이 쓰여서 싫기도 했다.  초밥과 문어를 특히 좋아했고 밥을 좋아했고 빵과 우유, 과자, 초콜릿은 거의 먹지 않았다. 술은 마셨지만 맥주 한 캔 정도 가볍게 먹는 걸 좋아했다.


2015년 여름 남편이 혼자 병원에 다녀와서는 의사가 큰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며 소견서를 보여주었다. 남편은 두렵고 떨리는 표정을 숨기려고 웃고 있었다. 소견서에는 폐에 종양이 의심된다며 10cm 정도의 크기가 적혀 있었다. 기분이 싸해지면서 저절로 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005년도에  폐암 의심 소견을 받고 암 전문병원인 N병원을 다녔었다. 검사 결과는 폐동정맥기형이었는데 N병원은 암 전문병원이었으므로 다른 병동이 있지 않아 폐암 병동에 입원해 폐동정맥기형 시술을 받으며 폐암 환자들의 사투를 지켜보았었다. 남편의 소견서를 보는 순간 폐암 병동에서 보았던 사투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을 하나둘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의 순서를 정하고 당사자인 남편과 하나하나 상의를 하고 결정을 했다. 우리는 N병원은 검사와 진료까지 대기해야 할 시간이 길어 지방대학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고 확진이 되면 N병원으로 전원을 하기로 했다.  


시간은 흐르고 조직 검사할 날이 다가왔다. 조직검사를 하러 가기 전, 우리는 이웃 몇 분과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러 갔다. 예전 같으면 딱 기분 좋았을 맥주 한잔이었는데  그 한잔을 마시고 남편은 도무지 일어나지를 못하고 자고 자고 또 잠을 잤다. 그 후로 남편은 술을 마시지도 마실 수도 없었는데 가끔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술이나 한잔 해야겠다" 하곤 했다. 술의 힘을 빌어 취하고 싶던 날이, 술의 힘을 빌어 울고 싶던 날이, 술의 힘을 빌어 용기를 내어보고 싶던 날이 얼마나 많았을까...


항암을 하면 밥을 잘 못 먹는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던 터라 폐암 확진을 받고 항암을 시작하기 전 여러 권의 항암 밥상 책을 사서 부지런히 읽었다. 우리 집이 유기농 농사를 지어왔고 슬로푸드 활동에 동참해온 터라 무엇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먹거리를 선택했다. 한동안은 수첩과 항암 수첩에 항암 식사 일기를 적기도 했다. 타세바라는 표적치료제를 쓰던 시기에는 조금씩 먹는 양이 줄어들긴 했지만 크게 먹는  문제를 느끼지 못했는데, 타그리소라는 신약을 임상으로 먹다가  내성이 오고,  알림타라는 주사 항암을 했을 때에는 효과는 전혀 없고 간에  전이된 종양이 다발성으로 크게 자라났다.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이 밀려오며 이내 팽창감이 느껴져 먹기를 힘들어했다. 뼈 전이까지 있어 한쪽 팔을 아예 움직일 수도 없었다. 병원에 입원해 하루 종일 먹는 지속성 진통제, 속효성 진통제, 주사진통제, 패치 진통제를 다해도 도무지 통증이 잡히지 않았다. 물도 넘기지를 못했고 약도 먹지를 못했다. 영양제를 달고, 진통제로 버티던 시간들... 남편이 이제 그만 항암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주치의는 충분히 시간을 줄 테니 천천히 결정을 하자며 아직 더 쓸 수 있는 약이 있다고 환자를 그냥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도 남편을 찾아와 용기를 주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매 순간 이게 우리의 출발선이라고. 남편은 항암을 다시 하기로 결정을 했다.  우리는 거처를 임시로 병원 근처로 옮겼다. 임시로 살기 시작한 집은 아파트촌이었는데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산길이 나왔다. 매일매일 매시간 구역에 힘들어하던 남편이 조금씩 걷기 시작할 때 말했다. 청국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작은 산길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청국장집에서 몇 개월 만에 식사를 했다. 몇숟가락 정도의 양이었지만 다음날은 짜장면을 먹었고, 다음날은 팥빙수를 먹었다. 다행스럽게도 항암은 효과를 보였다. 간 전이도, 뼈 전이도 크기가 줄어들면서 남편의 식사량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렇게 다시 남편은 밥을 먹게 되었다. 항암의 한 사이클이 끝나고 다음 사이클에 들어가기 전에는 초밥을 먹으며 작은 행복을 누리기도 했다.


폐암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이런 말을 한다 뭐든 지 먹는다고 하면 다 먹어야 한다. 그게 좋은 음식이던 나쁜 음식이건. 먹을 수 있고 걸을 수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먹는 항암이 아닌 표준 항암은 남편의 식성을 바꾸어 놓았다. 항암을 하면 남편은 밥 냄새를 참기 힘들어했다. 반찬을 만드는 냄새도 참기 힘들어하고 구역을 해서 한동안은 밥을 포장해와서 먹어야 하기도 했다. 밥 대신 빵, 비스킷이나 과자로 식사를 하기도 했다. 캔 참치에 밥을 비벼 먹겠다거나 물만두를 먹겠다고 하면 그건 정말 다행인 상황이었다. 하루는 치킨을 먹고 싶어 했는데 딱 한 조각만 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었으므로 패스트푸드 햄버거집에 들어가 윙 한 조각을 먹기도 했다. 남편은 또 한동안은 작은  초콜릿바를 하루에 스무 개도 넘게 먹었고, 또 한동안은 아이스크림을 하루에 열개씩 먹었다. 이런 음식들이 아니면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 없었으므로 이건 몸에 안 좋잖아, 먹지 말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남편이 먹을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한 일이었다. 한동안 좋은 음식을 먹이려고 남편과 소소한 다툼을 이어가던 날들에 남편이 말했다. 안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안 들어가서 못 먹는 거라고. 나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남편이 배가 부르다, 소화가 안된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건 간 전이가 더 커졌다는 신호였다. 이럴 때 남편은 커피우유를 조금씩 마시거나 아이스 홍차음료를 조금씩 마셨다. 자문형 호스피스를 시작하고, 결핵약 복용을 시작하면서 남편은 아예 먹을 걸 시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너무 힘들고 아파서 데굴데굴 굴렀다. 내가 아무리 결핵약 복용으로 통증이 몇 배로 가중되었다고 말해도 이해하지 않던 의료진은 남편이 장정 두 명이 붙잡아도 안될 만큼 아파서 몸부림치는 걸 본 후로 결핵약을 조절해주었고, 그 뒤로 남편은 데굴데굴 구를 정도의 상태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먹는 건 나아지지 않았다. 그나마 하루 한 숟가락이라도 먹으려 하던 시도도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가끔씩 정신이 명료하지 않아 질 때에는 나에게 존댓말을 쓰기도 했는데 " 나 밥 안 먹어도 돼요?"라고 물으며 괜찮다고 하면 안도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아픈게 싫어서 먹을 수가 없다고 했다. 뭔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물 한 모금만, 탄산음료 한 모금만, 커피우유 한 모금만 달라고 했다. 두유를 한모금 마시기도 했다. 정말 딱 한 모금씩만 먹을 수 있었기에 빨대를 잔뜩 사다 놓고 한 모금씩이라도 먹기만 해달라고 내 마음이 간절해졌다. 딸들은 카카오톡으로 커피우유 쿠폰을 선물해주며 아빠를 응원했다.  남편은 그 쿠폰을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날이 왔다. 전에 먹은 커피우유 한 모금이 그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장례식 때 아이들은 아빠가 좋아하던 거라며 날마다 커피 우유를 컵에 따라 제단 앞에 놓아두었다.


나는 커피우유가 슬프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 커피우유를 마신다. 그리움과 서글픔이 뒤엉킨 마음으로. 요즘 나는 남편의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다. 남편이 병원에서 사용하던 수저를 사용한다. 먹지 못하고 갔기에 뭐라도 배불리 먹여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간 게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 남편이 좋아하던 음식을 먹다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도 한다. 나는 왜 제사상에 여러  음식들을 놓아두는지, 음식 위에 수저를 올리는지 알고 또 알 것 같다. 음식은 그리움을 담는다. 그리움도 음식에 담겨진다.


나는 남편이 음료만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사용했던 빨대를 아직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유품인 것 같아서...


한동안 남편 항암 밥상 일기를 썼다. 남편이 음식을 못 먹기 시작하면서 나도 항암 밥상 일기 쓰는 걸 멈추게 되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