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을 코앞에 둔 아이들 손을 잡고 남대문 시장 길을 걸었다. 이 길은 여기저기 남편의 모습이 어려 있는 길이다. 이태전 겨울, 남편 병원 가는 길에 막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 시장으로 갈치조림을 먹으러 갔다. 겨울이었고 몹시 추웠다. 쌩쌩 부는 찬바람에 행여 막내가 추울까 봐 아픈 것도 잊은 사람처럼 남편은 막내 손을 꼭 잡다가 또 호호 불어주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주면서 시장 길을 걸어갔다. 몇 해 만에 처음으로 오래오래 걸은 날. 여행을 다니러 온 사람인 것처럼 그날 갈치조림을 기다리며 남편과 막내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표정으로. 갈치 골목으로 가는 길, 그 길에 서면 평화로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이렇게 걸어본 게 얼마만인지! 하며 상기된 표정을 짓던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난겨울에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올라와 남대문 시장에 있는 오래된 닭곰탕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병원을 와야 할 때, 종종 남편과 나는 그 집에서 밥을 먹었다. 닭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와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는 남편이 작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서 한 그릇 닭곰탕을 시켜두고 한 사람은 지켜보고, 한 사람은 힘 없이 밥을 먹고 있노라면 우리는 나이 든 가난한 연인 같기도 했다.
아이들과 꼭 닭곰탕 집에 가고 싶었다. 아빠가 종종 들르던 노포를 알려주고 싶기도 했고 맛있는 한 그릇을 아빠와 함께 먹게 하고도 싶었다. 닭곰탕을 먹이고 우리는 병원으로 아이들은 집으로 내려가야 해서 아이들과 나중에 집에서 보자며 인사를 나누었다.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들. 그날 남편은 오래도록 아이들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내가 가자고 말을 건넬 때까지 오래오래 아이들 뒷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남편은 본능적으로 인생의 시계가 오래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들 뒷모습을 눈에,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시간이 멈춰질 것만 같았다. 슬픔이 차곡차곡 차오를 것 같아서 애써 재잘재잘 거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남대문 시장 길을 걸으며 아이들에게 닭곰탕 집에 갈까 하고 물었다. 아이들이 싫다고 한다. 아빠와 갔던 곳. 아빠가 없어서 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더 가자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길을 걸었다.
"엄마, 저기서 아빠가 도넛을 먹었는데"
"엄마, 저기서 아빠가 호떡을 사 먹고 싶어 했는데"
아이들이 저마다 남대문 시장 길에 있는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한다.
나중에 더 나중에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 슬픔이 좀 무뎌질 때, 닭곰탕 한 그릇으로 아빠를 추억하고 싶어 지면 아이들 손을 잡고 닭곰탕 집에 다시 가보고 싶다. 글씨가 다 벗겨지고 있는 미원 냅킨 상자가 놓여있는 그 노포에.
걷고 걸어 명동길로 접어들었다. 아이들과 나는 명동성당 길을 올라 조용히 문을 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혼인성사가 진행되고 있다. 남편은 하늘로 가기 며칠 전 호스피스 병동에서 대세를 받았다. 날마다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았다. 나는 남편의 세례명을 요셉으로 해주십사 청했다. 날마다 가정을 위한 기도문과 부부를 위한 기도문을 읽었는데 요셉이라고 남편 세례명을 지으면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시며'로 시작하는 구절 때문에 남편이 가깝게 내 옆에 있을 것만 같았다. 혼인을 하는 저 부부. 서로 많이 많이 사랑하시기를. '이제 저희가 혼인 서약을 되새기며 청하오니 저희 부부가 그 서약을 따라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잘 살 때나 못 살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게 하소서' 나는 남편이 내게 미안해할 때마다 부부를 위한 기도문의 구절을 말해주곤 했다.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고 많았으나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그 사실이 축복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서울을 가게 되면 나는 또 남대문 길을 걸을 것이다. 그 길 여기저기에서 남편을 떠올리며 웃고 울 것이다. 어느 날 그 노포로 들어가 먹지도 못하는 뜨끈한 닭곰탕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