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에 따라 담벼락에 적힌 할머니들의 시를 함께 읽으면서 마을길을 걸었다. 그러다 마주한 김막동 할머니의 남편이란 시.
남편
나무를 때면서
속상한 생각
3년을 때니까 없어지네
허청이 텅 비어 브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무슨 시인 지 알 것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할머니 혼자되실 때를 생각해서 땔감을 허청에 가득해두고 가셨다는 할아버지. 남편도 내게 주고 가고 싶은 것이 많았을 텐데, 움직일 수 있었다면 해주고 간 것이 많았을 텐데... 가볍게 나선 자리인데 남편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해 그 뒤 길 따라 듣는 시들은 마음에 잘 들어오지가 않고 머리에 남편 생각만 가득해졌다.
길작은 도서관에 도착하니 1년 뒤 집으로 보내준다고 자신에게 편지를 쓰도록 해주신다. 받는 사람에 나와 남편의 이름을 함께 적고선 편지지를 들고 하늘에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1년 뒤에 이 편지를 읽게 되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야 하고.
저녁식사는 다슬기탕이다. 항암을 하다가 늘 간수치가 높아지고, 좋아지다가도 간 전이가 커져 문제가 되던 남편을 위해 우리는 간에 좋다는 다슬기를 넣은 칼국수를 먹으러 다니곤 했다. 남편이 좋아하던 다슬기인데...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 여행 참가자 중에 부부 참가자가 있었는데 서로 챙기며 식사하는 모습에 왜 그렇게 부러운 마음이 드는지...
다음날 숲 명상과 계곡 트레킹을 하러 숲으로 들어갔다. 숲 치유사 선생님이 트레킹 전 몸 푸는 동작들을 알려주셨다. 어깨도 풀고 목도 풀고 그러다 하늘로 가기 전 항문이 풀린다면서 평소 장을 잘 잡고 있어야 한다고 장 운동을 알려주셨는데 남편의 임종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남편의 항문이 풀려 임종이 다가왔다는 걸 알아챘었다.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 하루 종일 의지해야 했던 진통제 때문에 변비에 시달렸던 남편이었는데 항문이 풀려 나와 간호사 선생님이 둘이 힘을 보태어 몇 번을 기저귀를 갈아야 했었다. 햇수로 5년이 넘는 투병 기간 중 남편이 기저귀를 차야했던 건 표적치료제에서 표준 항암으로 바꾸고 항암 부작용으로 설사를 했을 때와 항문이 풀렸을 때 딱 두 번뿐이었다. 진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시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던 내 모습... 다음날 보랏빛으로 변했던 남편의 입술... 남편은 그 며칠 전부터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통증이 너무 심해 컨디션이 지금 보다 좋아지면 하자고 내가 계속 만류해 결국 남편은 목욕을 하지 못하고 하늘로 갔다. 깨끗하게 하늘로 가고 싶었을 텐데 여러 미안한 생각들도 하나둘씩 이어지며 떠올랐다. 어느 자리 어떤 곳에서 어떤 말을 듣고 무얼 하던 지 남편 생각이 나지 않는 일이 없다.
며칠 전에 함께 병원 생활을 했던 고 A님 아내분께서 카드와 함께 책을 보내주셨다. 함께 병실 생활을 했던 A님 아내분과는 어느새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언니와 나 둘 다 폐암으로 남편과 이별한 사별가족이 되어 버렸다.
가을날이 이쁘다.
햇살도 바람도 하늘도.
건강 잘 지키고 살자.
그리워할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겠지만
나를 보니
내가 잘 살고 있네
잘 살려고 노력하면서.
일 년 동안 여러 군데가 아팠어
간병 후유증인 지
많이 좋아졌다
언니 마음이 내 마음 같아서 카드를 읽고 또 읽었다.
요즘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힘든 일이 많이 찾아왔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많았다. 남편은 늘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하는 일은 아낌없이 응원해주고 또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완급조절을 하거나 감정조절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었다. 그가 없으니 내 마음의 중심, 커다란 기둥이 뽑혀나가 마음이 풀석풀석 자꾸만 내려앉는다.
잘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마음이 한없이 위축되기만 한다.
힘을 내야지. 곡성에서 집으로 돌아와 언니가 보내준 책을 마저 읽었다.
이제 막 예쁘게 터진 목화솜도 남편 사진 앞에 놓아두었다.
힘을 내야지. 하늘에 있는 그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어떤 생각도 안 했다는 듯이 마당에 감을 땄다.
사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아무 생각 없었다는 듯 그건 너무 힘이 든다. 앨범을 잔뜩 꺼내 남편 사진을 다시 보고 몇 장을꺼내어 냉장고에 붙여놓았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