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자란 마음

절밥을 탐하다

by 홍시궁

어릴 적 절에 대한 기억은 불교의 가르침을 행하는 엄숙한 종교적 공간이라기보다는 친숙한 생활공간으로 남아 있다. 부모님은 물론이려니와 동네 어른들이 대부분 예로부터 전해지는 민간신앙을 믿고 있었고, 그 바탕 위에 엄마들은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종교로서 절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절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절에 다니지는 않았고, 스님을 중놈으로 하대(下代)하고는 하셨다.


그러다 보니, 동네에 4개나 있던 조그만 절들은 뒷산과 옆산 중턱에 있기는 했지만, 산으로 자 놀러 다녔던 어릴 적 놀이의 형편으로 보면 시쳇말로 일종의 ‘놀이공원’이었다. 단지 ‘늙은 중놈이 혼자 덜렁 외롭게 지내는 외딴집’ 일뿐이었고, ‘중놈’이 절을 비웠을 때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즐거운 놀이터였다.


다만, 1년에 한 번 사월 초파일 무렵이면 얘기가 달랐다. 애들은 절에 얼씬도 할 수 없었고, 일주일 내내 동네 아지매들은 절로 쥐방구리 드나들 듯 들락날락했다. 마치 잔칫집처럼 복닥거리고 쑤석거렸다. 스님은 근엄한 표정으로 동네 아지매들을 닦달하기 바빴고, 아지매들은 또 스님 눈에 들도록 일하느라 몸뻬이가 흘러내리는 지도 몰랐다.

엄마는 한골이라는 옆 동네에 있는 절에 다녔는데, 500미터쯤 되는 뒷산의 중턱쯤에 있었던 지라 걸어서 한 시간은 올라가야 했다. “우리 동네 절에 안 다니고 와 이래 멀게 다닙미꺼?” 하고 여쭈면 “여그 시님이 젤 용하시다”고 하시고는 계속 그 절만 다니셨다. 형님이 중학교 입학시험 칠 때도, 고등학교 연합고사 볼 때도 언제나 엄마는 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하셨다.

사월 초파일만 되면 나도 기를 쓰고 엄마를 따라 절에를 다녔다. 스님들만 보면 ‘땡중’이라고 놀리면서도 이날만 되면 절을 찾은 이유는 엄마처럼 절에 가서 절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놀이동산’ 삼으려던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단 하나, 절밥 때문이었다.

먹을 게 별로 없었던 그때 절에서 주는 절밥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양푼에다 쌀밥 반, 보리밥 반을 섞고 그 위에 산에서 나는 각종 나물을 올린 후 깨소금과 고춧가루를 넣고 쓱쓱 비비고는 참기름을 한 소끔 두르면 되었다. 한 숟갈 가득 고봉으로 올려서 볼이 미어터져라 밀어넣고 와그작와그작 씹으면 그만한 황홀경이 없었다.


입안에 퍼지는 고소한 맛이며, 나물들의 향긋한 풋내음이며, 보리와 쌀이 어우러지는 밥맛이며 세상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같이 간 친구놈하고 서로 많이 먹기 경쟁하면서 “한 그릇 더 주시소예!” 양푼을 내밀면 “그래, 마이 묵고 마이 싸라. 그래야 얼릉얼릉 크제” 하시면서 살가운 웃음을 날리던 스님의 그 주름 많은 얼굴은 또 어찌 그리 부처님을 닮아 보이던지. 그런 날 두세 양푼은 그야말로 마파람 앞에 게 눈이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그런 맛깔스런 절밥을 찾아보기 힘들다. 촌스런 입맛이라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물 위주의 비빔밥을 찾아 열심히 고추(考推)하고 있지만, 그 정도 입맛을 당기는 곳은 쉽지 않다. 심지어는 유명하다는 사찰 음식점을 가도 겉맛만 화려할 뿐 그 소박하면서도 맛깔스런 속맛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재료도 훨씬 좋고 환경도 훨씬 깨끗한데 그 입맛이 쉽지 않음은 40여 년 세월에 내 입맛이 간사해진 때문일까.


요즘에 먹방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지만, 어릴 적에는 못사는 사람들의 음식으로 치부받던 ‘풀’ 중심의 먹거리가 요즘은 웰빙음식이다 힐링 메뉴다 하며 새롭게 대접받는 걸 보면서 참 격세지감을 많이 느낀다. 어릴 때 그토록 먹고 싶었던 쌀밥에 고기반찬은 이제 비만을 부르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고, 고구마니 감자니 푸성귀 등 소위 ‘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특이 젊은이들의 입맛을 유혹하고 있다. 불편해서 다들 싫다고 이구동성 허물어뜨리던 한옥이 집은 물론 가게의 인테리어로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예능 프로그램들에서도 농촌이나 어촌을 찾아 생활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많이 방영하고 있고,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세상은 참 요상하다.

그런 사회적 흐름을 보면서 ‘어쩌면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간혹 하게 된다. 어릴 적에는 농촌에 살면서 도회적 삶을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는 도시에 갇혀 살면서 농촌의 삶을 살고 싶은 그런 청개구리 같은 삶을 살고있지 않은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여전히 내 안에 농촌에서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 ‘장골’로 동네에 이름을 널리 알렸던 김명일이 아닌가. 이 자신감으로 앞으로 내 남은 삶을 보듬어 가리라 자주 다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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