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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gsari Nov 17. 2022

조르주 페렉-사물들

실비와 제롬의 기억 없는 세계, 추억 없는 세상. 나의 3월.

지난 1월 여행길에서 책을 선물 받았다.

조르주 페렉-사물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데에 두 달 정도가 걸렸고 3월을 끝으로 한 권의 책에 대한 되새김을 마쳤다.

굉장히 유려하고 섬세한 독설로 빼곡한 문장들.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흥미롭다.

이 책은 유난히 귀퉁이를 잔뜩 접어뒀다.

필사에는 흥미가 없기에 두 바닥 정도를 사진첩에 보관해뒀는데

나의 3월을 페렉한테 정밀 묘사당한 것 같다.


page119.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용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page126. 기억 없는 세계, 추억 없는 세상, 헤아리지 않아도 무미건조한 날과 주, 시간은 여전히 흘러갔다. 그들은 더는 욕망하지 않았다... 일상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수업, 레장스 카페에서의 에스프레소, 저녁 시간에 보는 영화 두 편, 신문, 낱말 맞히기. 그들은 몽유병자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상실했다.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이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의 끝, 6년 동안 삶이 굴러온 모호한 궤도의 끝,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심각하고 긴급한 현재의 실상.

어쩌면 2021년 언저리부터 제롬과 실비와 발맞춰 걷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파리에서 스팍스로의 도피와 같은 인사이동이 그즈음이었을 테니까.

언제든 스팍스로부터 떠날 수 있다.

잊지 말고 끊임없이 지나간 발자국을 복기하자.

그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

나에게는 제롬과 같은 영혼의 동반자가 없고 그들보다 훌쩍 살아버린 세월이 길다.


삶이 허락하는 한 끝없이 계속될 성취라는 것을 보았을 때, 아니 봤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들에게 기다릴 힘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달된 상태만을 원했다.


행복해야 한다는 집착.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감정적, 정서적인 충족.

성공에 대한 열망.

가치관, 그 방향성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가능한 최대치의 부와 쟁취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명예.

허영. 인생에서 틀린 선택은 하지 않겠다는 강박, 자기 검열.

나의 사물들로 점철된 나.

영양가 갖춘 생각을 하고 한 발짝 디뎌보고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 번 딛는 것.

느려도 방향감을 상실하지 말자. 4월은 최소한 고개를 들고 천천히 나아 가자.


나의 기억이 지배하는 세계, 추억으로 물들어 있는 세상. 남은 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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