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았던 안방 문을 열고 나오면 꽤나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지난다. 가을 아침이다. 날이 선선 해지면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는데 그게 꽤 반갑다. 이번 여름은 내 생에 가장 많이 땀을 흘린 여름이었다. 작지만 한 사람이 내 안에 함께 있어서 그런 건지 임신을 하면 원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많이 땀이 났다. 그래서 이불을 푹 덮고 잘 수 있는 것도 반갑고, 아침에 맞이하는 찬 기운도 반갑다.
아기는 봄의 한 가운데에 내 안에 생겼다. 그 때 맞이한 설레는 기분과 어울리는 봄꽃들에 들뜨기도 했고 가끔씩 닥쳐오는 꽃샘추위처럼 한 번씩은 우울하기도 했다. 시간은 지나 여름이 왔고 더위가 왔고 많아진 땀과 함께 변하는 내 몸에 적응해 나갔다. 길지만 짧은 계절이었다. 매일이 다른 기분이었고 비가 오고 해가 쨍한 그런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 어느 날 아침 방 문을 여니 밖은 가을이 되어있다.
임신 초기에 배탈이 한 번 난 다음부터 보리차를 끓여 먹기 시작했다. 여름엔 가뜩이나 더운데 보리차까지 끓일 때면 온 집안이 후끈해서 싫어하는 일이었지만 가을이 오니 달라졌다. 구수한 보리알 향기가 온통 퍼지고 보글보글 소리가 차가운 가을 공기를 일렁거리게 했다. 차가워진 바람은 보리차를 훨씬 빠르게 식혀주기도했다. 일부러 보리차를 끓이는 옆 식탁에 앉아 음악도 듣고 책을 읽기도 한다. 몇 분 안되는 그 시간이 즐거워졌다. 나도 제법 임신한 내 몸에 익숙해진 기분이다. 사실 전 보다 손가락 관절, 허리, 꼬리뼈 안 아픈 곳이 없고 배가 불러져 간질간질 튼살도 올라오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니 이러한 것들을 대하는 내 마음도 달라졌다. 훨씬 편안해졌고 작은 걱정은 후 불어 날릴 수도 있게 되었다. 아기와 내가 함께 크는 계절인 게 확실하다.
아가야, 가을이왔어. 이렇게 코끝이 살짝 차가워지고 너처럼 모든 게 익어가는 그런 계절이야. 가을 내 살이 올라 익은 밤을 설탕에 절여 유리병에 넣어두었다가 눈이 오는 한 겨울에 한 알 씩 꺼내 먹으면 그게 참 달콤하단다. 매일을 조금씩 커가는 아가야, 우리도 달콤한 밤조림처럼 아주 추운 겨울에 만나자. 엄마는 내심 너를 만나는 날 창밖에 눈이 왔으면 하는 생각도 해. 그리고 너가 크면 눈을 보며 밤조림을 꺼내 먹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지만 맛있게 한 번 해볼게. 기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