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동그라미였던 배 안의 아기가 23주가 넘어가면서 제법 커지는 중이다. 그 전까지는 2주에 한 번 병원에 가서 보는 초음파 화면 속에만 존재하던 아기였다. 잘 있는지, 잘 자는지, 심장이 뛰는지 매일이 궁금했지만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병원가는 날이면 더욱 긴장되기도 했고, 우울한 감정이 자주 불쑥 올라오기도 했다. 혹여 티비나 유튜브를 통해서 안타까운 아기의 소식이라도 보게 되면 그 불안은 더욱 커지기도 했다.
다행히 나는 태동을 빨리 느낀 편이었다. 16주쯤부터 뱃 속에 미끄덩거리는 물고기가 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아주 가끔 특정 자세를 취할 때 잘 느껴졌는데, 금붕어보다도 느린 물고기가 좁은 자궁어항을 한 번씩 미끄러져 헤엄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만 해도 아주 뜸하게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이었기때문에 나 혼자 비밀스럽게 기뻐했다. 남편에게 이 느낌을 설명하기 너무 어려웠고, 그도 정말 궁금해했지만 영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아기와 내가 처음으로 작은 소통을 한 것 같아 들뜨고 설렜다.
태동이 뜸한 날도 있었지만,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움직임은 커지고 있었다. 한 번씩은 아주 크게 손을 뻗는건지 나를 놀래 키기도 했고, 이제는 물고기보다는 개구리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의 패턴도 생기기 시작했다. 아기는 아침보다는 밤에 움직이기를 좋아했고, 특히 저녁을 먹고 난 후 혹은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아주 활발해졌다. 남편도 함께 아기를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 몇 차례나 배에 손을 얹고 기다린 적이 많다. 3초 전까지도 움직이던 아기가 뭔가를 알기라도 하는 듯, 배에 손을 얹는 순간 같이 잠잠해졌다. 우리 둘이 숨죽이고 있듯 아기도 같이 숨죽이는 것 같아 귀여웠지만 아쉬웠다. 그러다 어느 날 드디어 톡 치는 듯한 움직임을 남편이 느꼈는데, “이거야? 방금 한 거야?”를 몇 번이나 물으며 신기해 했는지 모른다. 이제야 내 배에 정말로 아기가 있구나 실감한 눈치였다. 처음으로 우리가 아기의 존재를 느끼며 행복해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장면이 보고싶어 한 번씩 남편 손을 배 위에 얹어 둔다.
임신 후 생긴 변비 탈출을 위해 저녁에 한 번씩 바나나와 우유를 갈아 마시기도 했는데, 처음으로 아기가 어떤 메뉴에 대해 실시간 피드백을 보내온 게 바로 이 바나나우유다. 바나나우유를 마실 때마다 태동이 활발해져 처음 몇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3번, 4번이 반복되면서 눈치 없는 나는 그제야 아기가 바나나우유에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찾아보니 달콤한 걸 마시면 아기들이 입을 벙긋거리면서 움직인다는 내용들이 있었다. 다른 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우리 아기는 바나나우유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바나나우유를 좋아하는 아기라니. 이렇게 바로 반응을 해준다니.
세상에 태어나면 엄마가 바나나우유를 만들어 줄게.
커다란 바나나도 하나 다 쥐고 먹게 해 줄게.
바나나를 칼처럼 휘두르고 놀아도 좋아.
바나나를 마주보고 함께 먹자.
바나나가 얼마나 달콤한 지 먹어보고
그보다 더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줄게.
실제로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임산부의 긴장도도 내려가고 마음의 안정이 온다는 연구들이 있다. 그 말에 정말 동의한다. 이제는 초음파실 대기 의자에서도 느껴지는 아기의 움직임 덕분에 긴장이 풀린다. 귀하고 기억하고 싶은 시간들이다. 요즘처럼 예쁜 가을하늘을 얼른 아기에게도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