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를 따라 흰 천이 휘날리고, 짙은 대청마루 맞은 편엔 오래된 나무들이 가득한곳. 이 곳에 앉아 남편과 와인을 마신 적이 있다. 완주에 있는 이 고택은 250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아침형 인간이 아님에도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일찍 뜨게 되고 창호지가 발라진 창문을 열면 맞은편 산이 안개에 옅게 서 있는 곳이다. 아주 큰 자연과 맞닥뜨리게 되면 휘감아 압도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묶여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고 나면 나 자신이 아주 하찮고 작아지며, 마음 속 걱정이나 사념이 부끄러워진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그 날의 아침을, 그래서 그 곳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집을 조금씩 접했는데, 그 중 처음이라고 말할 만한 책이 ‘고은’작가의 <순간의 꽃>이라는 작은 시집이다. 말 그대로 몇 줄 안되는 시 편들이 이어져 있다. 메모처럼 보일 정도로 읽기 쉽고 금방 읽히는 만큼 몇 번이고 꺼내 보기에도 만만한 책이다. 최근 몇 년 전 이런저런 뉴스가 있었던 작가였던 게 안타깝지만, 그래도 이 책 안에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생각나 적어본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어딘 가에 앉아 입자가 굵은 함박눈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걸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커다란 눈이 자주 내리니, 온 세상이 금방 하얗게 뒤덮였을테지. 까맣게 때묻은 것들이 덮이고, 언쟁하던 사람들이 몸을 피하고, 아이들과 강아지만 남아 하얗게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가슴 속 억지와 욕심과 시기들이 땅에 착륙한 함박눈처럼 다 녹아버렸을 거다. 덕분에 무죄가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고, 없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 여기에는 봄 날에 앉아 가늘게 눈을 뜨고 바람에 날아갈 듯 앉아 있는 시인도 있다. ‘김선우’작가의 <녹턴>이라는 시집에 있는 시 한 편이다.
봄꽃 그늘 아래 가늘게 눈 뜨고 있으면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좋아
먼지처럼 가볍고
물방울처럼 애틋해
비로소 몸이 영혼 같아
내 목소리가 엷어져가
이렇게 가벼운 필체를 남기고
문득 사라지는 것이니
참 좋은 날이야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참 근사한 날이야
인간이 하찮게 느껴져서
-[바람의 옹이 위에 발 하나를 잃어버린 나비 한 마리로 앉아] 전문
봄이 오고 바람이 불고, 그 안에 춤추는 나비와 벌레들 사이에 눈을 감고 앉으면 어느새 나는 점점 흐릿해 진다. 꽃가루가 뚜렷해 지고 물방울이 선명해지고 나는 흐릿해 진다. 그 느낌이 좋고 만족스럽다. 내 목소리가 엷어지고 문득 사라져버릴 것 같은 오늘이 좋다. 내가 하찮으면 내 걱정과 불안도 하찮은 게 된다. 미워하던 사람이 하찮아지고 바라던 모든 것이 하찮아 져 더 이상 가지고 싶지 않게 된다. 편안하다.
나는 생각도 많고 우울에 쉽게 발을 디디는 사람이다. 빨리 빠져나오는 혼자만의 방법이 필요한데. 가끔씩 아주 높은 산에 있거나 심지어 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충분히 내가 하찮게 느껴질 만큼 기다린다. 쉽지 않은 날도 있지만 그렇게 되고 나면 신기하게 기분이 금방 괜찮아 지기도 한다. 머릿속을 지지고 볶던 것들이 먼지처럼 흩어지기도 한다.
이런 감정과 과정이 느껴지는 시들을 만날 때면 그래서 반갑고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