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간혹 곤고한 시간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 곤고함 앞에서 겁쟁이와 불신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그 모습은 나의 모습이 될 수 있고,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 곁에 있었던 황새 한 마리가 먼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내겐 곤고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심정은 세상엔 누구도 가엽게 여겨줄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는 한 자연과학자의 서러움일지도 모릅니다.
허례와 위선과 작별한 크리스천은 굽은 길에서 또 다른 순례자들을 만났습니다. 크리스천이 곤고의 언덕을 넘자마자 그는 이 길을 역주행해서 오는 두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겁쟁이와 불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습니다. 겁쟁이는 갈수록 위험한 일들을 만나는데 어떻게 이 길을 전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차라리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불신은 이 길로 계속 가다 보면 저 앞 길목에 사자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 길을 계속 간다면 결국 사자 밥밖에 더 되겠느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미래에 직면할지 모르는 고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순례의 발걸음을 되돌려 그릇된 길을 가고만 것이었습니다.
겁쟁이와 불신(2022)
유황불로 타버릴 멸망의 도시로 되돌아갈 수 없었던 크리스천은 가던 길을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겁쟁이와 불신이 되돌아간 길이 멸망의 길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가파르고 곧은길로 산길을 계속 올랐습니다. 그는 손과 무릎을 땅에 댄 채 간신히 산을 기어올라 갔습니다. 산 중턱에 오르자 큰 나무가 나그네의 쉼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크리스천은 나무 밑에서 잠깐 졸다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깊은 잠에 빠진 크리스천
그때 누군가 그에게 나타나서 그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이 소리를 듣고 잠을 깬 크리스천은 벌떡 일어나서 산꼭대기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바삐 올라갔습니다. 얼마 후 크리스천은 위안을 얻기 위해 두루마리를 읽어보려고 가슴 안쪽에 손을 넣어 보았지만 그 두루마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낙심천만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야말로 난감했습니다. 거기 적힌 말씀을 보면 위안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루마리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이기도 했습니다. 크리스천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허공만 쳐다보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고개 중턱의 쉼터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크리스천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서 어리석은 행동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쉼터로 돌아가는 길은 크리스천에게 한 없이 무겁고 괴로웠습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쉼터까지 내내 크리스천은 길바닥을 여기저기 샅샅이 훑었습니다. 여행길에 큰 위안을 주었던 두루마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두루마리는 그가 잠깐 쉬던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그는 탄식했습니다."대낮에 나무 밑에서 졸다니, 나는 참 어리석은 인간인가! 더구나 위험과 곤경의 한가운데서 낮잠을 자다니! 고갯길의 주인은 순례자들에게 영혼이 한숨 돌리고 가도록 나무 밑에 쉼터를 세웠건만 난 그 쉼터를 이용해서 육신의 쉼을 얻는데 급급했구나!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나무 밑에서 쉬어 가는 순례자(2022)
영성의 잠을 깨운 황새
나도 늘 깨어있으려 하지만 내 육신은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내게 육신의 평안이 찾아오면 그 생활에 안주하고 맙니다. 그러던 중 나의 잠을 깨웠던 황새가 있었습니다. 바로 '산황'이라는 이름을 가진 황새였습니다. 우리나라 충북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에서 마지막 살았던 황새 이후 거의 50년 만에 자연 방사한 황새라서 예산의 '산'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산황이는 그냥 황새가 아니었습니다. 자연과학자에게 그 가설을 입증시켜 줄 결정적 키를 가진 황새였기 때문입니다.
잠을 깨운 황새(2017)
황새를 첫 자연복귀(방사)시켰던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산황이는 9마리의 동료들과 함께 9월 충남 예산황새공원에서 자연으로 복귀됐습니다. 산황이가 혼자서 자연 방사 3개월 만에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까지 도달했습니다. 나는 자연과학자로 그의 등에 전파발신기를 달아 그가 이동한 경로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산황이가 신안 앞바다 우이도 인근 갯벌에서 먹이를 먹다가 남쪽을 향해 비행을 시작한 시각은 2015년, 11월 24일 오전 9시였습니다. 그날은 하늘에 짙은 구름이 덮인 흐린 날이었습니다.
오후 6시가 지났을 까요, 산황이의 발신음이 중국 양츠강 하구로 부터 먼바다 동중국해에서 잡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산황의 나이 2살이었고, 산황이에게는 장거리 이동이 첫 경험이었기 때문에, 조상으로 부터 유전자 정보에 각인된 지도를 따라 양츠강 하구 겨울 철새도래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곳까지는 신안 앞바다에서 약 600km에 달하는 곳이었습니다. 양츠강 하구 철새도래지 200km을 앞두고 산황이가 비행진로를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건 아닌데!" 나는 산황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 시각 기상청으로 부터 자료를 실시간 받기 시작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산황이가 진로를 변경하기 시작할 시간, 중국 상하이는 비가 이미 내리고 있었고, 동중국해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산황이는 비행경로를 거의 90도 좌측으로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산황이가 선택한 그 방향은 산황이가 착지할 어떤 섬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였습니다.
망망대해, 높은 파도 위를 날고 있는 산황이(2015)
이렇게 산황이는 망망대해의 높은 파도 위를 정처 없이 날고 또 날았습니다. 신안 앞바다를 출발한지 하루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일본열도 남단 오키나와 인근 오키노에라부 섬에서 다시 신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태까지 산황이는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고 거의 1,007km을 비행했던 것입니다.
2015년 11월 26일 오전 7시를 기점으로 산황이가 보낸 발신음은 더 이상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섬에 도착하고 12시간은 산황이가 살아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발신음이 끊긴 그 이후 산황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연과학자로 먼저 일본 황새 전문가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일본 황새 복원 전문가들 앞에서 산황이가 일본으로 날아간 경위를 설명했습니다. 내 설명을 들은 일본 과학자들도 산황이의 행방을 찾기 위해 오키노에라부 지역단체장에게 연락을 취해 주었습니다. 지역 방송에선 "한국에서 황새 한 마리가 이 섬 마을에 도착했으니 황새를 보신 분은 즉각 신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방송은 산황이의 발신음이 끊긴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갔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까요. 한 남자가 공항 활주로에서 머리에 피 흘려 쓰러진 황새를 발견하고 곧바로 소각시켰다고 자수 해왔습니다. 내가 이 소식을 접한 것은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였습니다.
오키노에라부 공항 측에 메일을 보내, 산황이의 소각 사실을 따져 물었습니다. 만일 소각했다면 그것은 일본도 황새를 천연기념물, 그것도 특별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 소각, 즉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불법 현상변경에 해당됩니다. 나는 불법소각한 공항 직원을 일본 가고시마 검찰청에 고발했습니다. 정말, 산황이가 죽지 않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섬에서 어떻게 적응해 가는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아마, 산황이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그의 행적을 추적한 논문이 세계적 조류학술지에도 투고됐을 것입니다.
고발 후 1년이 지났습니다. 관할 가고시마 검찰청은 불법 소각처리한 범인을 수사도 않고 불기소 통지서만 내게 보내왔습니다. 나는 통지서를 받고 '과연 내 나라가 주권국 맞나? 힘없는 한국 땅에 태어난 한 자연과학자로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통상 외무부나 문화재청이 나서 주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나서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너무 서러워,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이 사건은 내게 많은 의심을 남겼습니다. 불법소각이 아닌 산황이가 총에 맞아 죽은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 공항 측으로부터 온 산황이의 폐사 경위서에서 발견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공항 측은 '산황이가 활주로에 있다가 착륙하는 여객기에 머리가 부딪쳐 피 흘려 쓰러져 있는 사체를 발견하고 즉각 소각장으로 보냈다'라고 적어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날 여객기의 조종사가 착륙하면서 산황이를 목격한 사실도 기록으로 남겨 내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객기 어느 부위에 충돌 자국이나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지 않았겠어요. 그것을 사진으로 보내달라 요청했습니다. 보내온 충돌 지점의 여객기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습니다. 공항 측의 해명이 이것으로 끝나자, 나는 더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산황이가 공항 활주로에 나타났을 때는 34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진 맥진할 지경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오키노에라부 섬은 논이 없고, 대부분 농경지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산황이는 아무리 둘러봐도 먹이를 먹을 논습지라고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산황이가 발견한 곳이라고는 활주로 주변에 무성한 풀들, 그곳에서 풀벌레를 잡기 위해 서성거렸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놀라 풀쩍 날아보았지만, 그리 멀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몸은 탈진 상태로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아침해가 밝았고, 여객기 동체의 바퀴가 활주로에 미끄러져 내려오는 순간, 두 번째 총알이 산황이의 머리를 관통하고 말았습니다. 쓰러진 황새를 발견한 공항 직원은 산황이가 심상치 않은 새로 여겼습니다. 등에 전파발기기 부착한 것을 눈치챈 직원은 겁이 났겠지요. 관계기관에 신고도 하지 않고 소각했다는 공항 직원의 진술서에는 자신은 '황새인 줄 몰랐다'고 딱 잡아낸 것을 보면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구름, 황새 그리고 여객기(2016)
산황이를 통해 알고 싶고 내 선배 과학자들이 규명하지 못한 것을 꼭하고 싶었는데, 산황이의 죽음은 나에게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고난은 성경말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행 14:22)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롬 8:26-27)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나는 남은 황새들과 함께 이 순례길을 계속 걸으면서 마음을 다시 잡아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