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앤 Mar 16. 2021

안이 바깥날씨보다 추운 날

그러나 모든 날은 지나간다.

아이가 집 마당에서 엊그제 사다 놓은 비눗방울을 즐기고 싶어 했다. 아침부터 햇살이 그윽하게 집 안 거실로 들어와 인사를 하듯 반겼지만 실내는 여전히 서늘했다. 더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이가 먼저 날씨가 좋다며 종알거렸다. 밖이 더 따뜻한 건 맞았다. 그리고 급기야 신발을 신고 나가겠다고 자처했다.


나는 그때 마를린 먼로에 대해 어떤 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가 금발이 실제로 아니라며 말이다. 아주 중요한 대목이었다. 그 부분은 나도 처음 들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나를 잡아끌어 바깥문을 열게 했다. 말이 마당이지 두 평도 안 되는 발코니 같은 역할의 공간이고 자칫하면 지대가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질 수 있는 언덕 위의 집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또 집이 언덕 위에 있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장소이다. 왜냐하면 지면과 맞닿아 있는 곳도 바로 윗집이니까 말이다. 골이 깊은 언덕의 중간쯤에 위치한 집이라고 말해야 더 쉬울 것 같긴 하다. 그 골 따라 그대로 세운 아파트 말이다.


아무튼 아이가 밖에서 노는 걸 보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놀다 발을 헛디디라도 하면 아랫길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3살 아이는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는 습성이 있다. 엄마가 아이를 보려면 체력적으로도 강해야 하며 함께 뜀박질도 어느 정도 따라주어야 한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달리기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닌 선수가 될 정도로 빠른, 반에서 1등으로 달리기를 잘하던 아이였다. 그러나 반대로 심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엄마는 매번 선수가 되는 걸 반대하셨다. 나는 생각했다. 내 심장은 안녕하지 못한가,라고.


그 이후 나는 심장이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아이가 되었다. 아무래도 어릴 적 급성폐렴을 앓던 병력이 있어서 엄마는 으레 그렇게 짐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나의 심장은 안녕하다. 내가 생각하기로 말이다.


어쨌든 마를린 먼로의 금발 사연을 더 듣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마음을 접고 아이에게 현관문을 열어준 지 5분도 안되어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잡기 위해 열심히 파란 슬리퍼를 끌며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미 예상한 일이라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다.


급기야 함께 나가는 걸 택했다. 제대로 운동화를 갖추어 신고 세니타이저도 준비하며 아이와 놀이터로 갔다. 그곳에는 19개월 된 백인 남자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놀고 있었다. 19개월 되었다는 건 내가 그 할머니에게 물어봐서 알았다.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을 그 할머니는 우리 아이에게 연신 'She' 'Her'라고 지칭했다. 왜 우리 아이는 자주 '그녀'가 되는지 모르겠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아이가 여자애인 가요 아니면 남자 애인 가요?"

"남자아이예요."

"에엥? 아니 무슨 머슴애가 예쁘장한 게 계집애같이 생겼대?"

"아 네..."


하마터면 나는 죄송하다고 말할 뻔했다. 생각해보니 왜 내가 죄송? 주황색 조끼를 입혀서? 남자아이가 예쁘장해서?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오늘 아이는 흰색과 노란색이 섞인 후드 재킷에 블랙 쫄바지를 입고 있었고, 흰 운동화에 빨간색 나이키 상표가 바깥쪽에 그려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 헤어 스타일? 좀 더벅머리 같기는 하다. 파마를 좀 시켜볼까 하는 생각으로 자르지 않고 기르는 중이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 할머니가 내내 여자 아이 취급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이해했다 해도 영어로 반박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다. 할머니의 언어가 한국어와 다른 영어임을 눈치챈 아이는 자기도 아는 영어를 해야 했기에 미끄럼틀을 내려오며 "원투뜨리포..... 나인텐!"을 외치며 뿌듯하게 내려왔다.


날씨는 더웠다. 75도가 되는 온도이면 한국 온도로 24도가 조금 못된다. 그냥 초여름 날씨다. 놀이터를 나와 호숫길을 걷고 빵을 사러 잠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오히려 추웠다. 맞추어 놓은 온도에 히터가 돌아가고 있을 정도였다. 큰 방 쪽은 아예 북향이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손이 차가울 정도다.


늘 그래 왔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때는 밖의 날씨보다 안의 날씨가 더 춥다. 혼자 집에서 궁상을 떨고 있는 것 같아 이런 날에는 오히려 밖에 나가 즐겨야 제대로 된 온도를 만끽할 수 있다.


놀이터의 햇빛 받은 미끄럼틀의 손잡이는 손으로 대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걸 보면 오후가 되어 빛도 안 드는 집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추위에 민감한 나는 이런 환절기의 집 온도가 사실 불만이다. 밖에 나갈 수 없는 사정의 날은 더 대조되는 온도 속에서 나를 구겨 넣고 있는 기분이 든다.

오늘처럼 나갔다 들어오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도 지금 밖은 여전히 따뜻하고 덥다. 그 열기를 집 안까지 마구 가져오고 싶다.


그러나 참다 보면 안의 온도도 봄처럼 올라가는 날이 온다.

그때는 아무래도 5월일 것이다. 4월까지는 매우 덥고 춥고를 반복할 테니 말이다. 마치 인생의 고비 같은 느낌이 든다. 표현을 하자면 뭐 이런 것 정도 되지 않을까?


<밖에는 파라솔을 피고 남녀노소가 하하호호 웃고 있다. 옷은 역시나 밝은 원색 바탕에 꽃무늬이거나 가볍게 찰랑거리는 소재이다. 빛을 받아 유난리 하얗게 빛나는 흰색 강아지가 주인을 따라 나와 촐랑촐랑 걷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다리 하나를 들고 나무 밑에 오줌을 갈긴다. 똥도 누려나. 뱅글뱅글 돌며 앞뒤 다리를 흙을 파헤치듯 긁어내는 시늉도 한다. 시선을 다른 곳에 두려고 고개를 돌리니 햇살이 내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빛이 매우 세다. 집 안에 들어오는 빛은 그게 다다. 내 발은 집 안 온도와 비슷하게 차다. 그늘진 곳의 비애 같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은 웃고 있고, 나는 마치 어두운 늪에 빠진 것 같은 고비. 살면서 이런 고비 하나쯤 안 거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만 이랬어?라는 물음은 참 어리석다. 나이를 먹고 보니 그렇다.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괴로워도 흐르고 즐거워도 흐른다. 집 안의 차가움은 가시고 바깥의 열기가 안으로 스미는 때가 있다. 그때는 온전한 봄과 함께 여름도 준비된다. 인생에는 새소리를 듣고 아름답고 청아하다고 말할 날이 분명 온다. 예전에 몰랐던 감사함도 보너스처럼 따라온다. 나이를 먹고 보니 이 또한 놀랄 것도 없다.


그나저나 마를린 먼로는 왜 태생부터 금발인 것처럼 속였을까?




  


 

작가의 이전글 세 살 아이의 그림책을 보며 <사진 에세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