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육아를 하며..
삶이 코스 요리와 같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누구는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또 누구는 현실을 잘 맞닥뜨리며 산다. 순순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삶을 순순하게 펼치며 사는 삶은 가능할 것 같다.
나는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가.
오랜만에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기 위해 남편이 나들이를 제안했다. 세 살 아이와 함께 외출을 하는 것은 매우 모험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또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어디든 나가보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 말은 그냥 모험을 무릅쓰고 고생을 자처하며 '아이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며 이 정도는 아이 키우는 집답게 기본으로 깔고 간다고 보면 된다. 단지 나이가 들어 쫓아다니기 기운이 달려서 문제지.
향한 곳은 워싱턴 DC 조지타운이었다. 윌슨 브릿지를 지나 바로 오른편으로 주욱 펼쳐지는 곳이 바로 조지타운의 중심가이다. 이곳에는 아래쪽으로 포토맥강이 흐른다. 강 쪽으로 차를 대기 위해 주변을 맴돌았지만 결국 모두 차 버린 길가 주차를 포기하고 빌딩 안으로 돈을 내고 들어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있다 보니 오래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22불을 지불하고라도 주차를 해야 맞는 말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런 일에 감이 사라진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 텍도 없다. 악착같이 동전 넣는 길가 주차를 찾아내거나 강가와 멀더라도 저렴하게 주차하는 걸 택했을 거다. 이 또한 아이가 생기고 달라진 점 중에 하나다.
주차요금에 비해 장소는 매우 협소하고 어둡고 무엇보다 많은 기둥으로 인해 차를 움직이기에도 불편했다. 땅이 비싼 이런 곳에서는 아마도 다 감안을 하는 일 같아 말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컴플레인을 한다면 뭔가 촌스러울 것 같은 그런 거.
물가로 걸어 나와 바람을 쐬다가 이태리 레스토랑을 발견하고 들어가 앉았다. 창문이 뻥 뚫린 곳이어서 바이러스를 좀 덜 걱정해도 되었다. (이제는 으레 식당이 과연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가를 먼저 체크하게 된다. 실내형보다는 바깥공기와 맞닿은 테이블이라든지 돔 형식의 각기 테이블이라든지.)
웨이터가 메뉴를 들고 나타났다. 메뉴는 상상 이상이었다. 아니 메뉴가 아니라 메뉴에 적인 가격 말이다. 두 자릿수는 당연한 것이지만 숫자가 보통 1이나 2로 시작할 법한데 2와 3이 더 많았다. 아, 곤란해지는 이 상황. 그러나 남편은 흔쾌히 코스요리를 지목했다. 그래, 까짓 거 다 2랑 3으로 시작하는데 코스요리가 낫지! 코스요리에 8을 더한 랍스터 롤도 시켰다. 몇 초 전과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비싸도 먹고 싶은 거 시켜야지! 암!
예전에 어느 MC가 배우에게 물었다. 내가 돈 좀 벌었구나, 혹은 내가 성공했구나, 하는 걸 어느 때 가장 크게 느끼냐고. 그랬더니 얼굴도 생각 안나는 배우가 대답했다.
"저는 가격 상관없이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주문하고 먹을 때요!"
너무 엉뚱한 대답 같아 잠시 웃었지만 한 때 배고프게 살았다던 배우는 그게 실감 나는 성공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그럼 나도? 맞든 말든 혼자 낄낄거려보았다.
코스 요리는 심플했다. 애피타이저 - 메인 메뉴 - 디저트
애피타이저 : 밤 수프 / 치아바타에 초록 마른 잎과 치즈
메인 메뉴 : 해산물 토마토 파스타 / 랍스터 롤
디저트 : 튀긴 잣을 얹은 타르트와 젤라또 / 티라미수
코스 요리 두 개를 시켰기 때문에 각각 선택했다. 선택의 여지는 생각보다 많았다. 고르는 즐거움도 코스 요리 중에 하나였다. 정중하게(?) 옷을 입은 웨이터가 차례로 하나씩 가져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특히 애피타이저에서 마른 초록잎들을 직접 절구에 넣고 빻아서 접시에 올려 주었다. 곱게 갈린 걸 써도 무방 했을 텐데 굳이 고객 앞에서 그걸 보이며 빻고 있는 모습은 퍼포먼스를 위한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차가운 치즈는 아이스 드라이까지 동원되어 쇼를 펼쳤다.
아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얼음만 씹어댔다. 와그작.... 잠시 후 또 와그작와그작.
급기야 메인 메뉴가 나오기도 전에 디저트를 미리 부탁해 아이 자리에 올려놓았다. 금박과 식용 꽃도 등장했다. 뭘 이런 걸 다. 그러나 아이는 젤라또 몇 스푼 맛을 보더니 다시 촌스럽게 얼음만 찾아댔다.
결국 티라미스는 우아하게 앉아서 먹지도 못하고 아이가 떼를 쓰는 바람에 투고로 가지고 나와 버렸다. 아! 나의 코스 요리여! 급히 먹고 나올 공간은 아니었다. 앞에는 강이요, 산들거리는 바람은 얼굴을 키스하듯 스치고, 카페는 블루빛의 물고기 벽그림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하고, 의자 위에 양털 매트는 내 엉덩이를 따뜻하게 지켜줄 것만 같았는데.
삶에서 많은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깨어지는 순간은 잦다. 나의 시간은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함께. 특히 아이를 키우며. 그래서 상상의 나래는 날개를 달고 더 많은 활약을 한다. 이해하기 힘든 미래도 다녀왔다가 저 숨은 과거로도 가고.
삶도 코스요리처럼 척척 알아서 가주면 안 되나?
처음부터 달콤하며 유혹이 될 만하며. 뭐 그런 매혹적인 애피타이저처럼 삶도 그렇게 시작할 수는 없을까. 달달하게 시작해 순조롭게 메인에서 하이라이트를 쳐주고 마지막 깔끔하면서 아름답게 마치는 인생. 힘들이지 않고 알아서 척척 내 앞에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는 코스 같은 인생.
그래도 지금, 그런 건 개나 줘! 라며 정신을 차리게 된다. 뒤죽박죽인듯한 삶을 코스 요리같이 정갈하게 보이며 사는 삶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나이 덕이지 싶다. 누군가 그러더라.
"육아는 오십에 해야 제대로 사람 돼서 키워!"
어이없는 말에 웃음이 나지만 뼈 아픈 진실! 아, 나는 육아에 조금 자격이 될랑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