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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앤 Mar 18. 2021

뭘 좀 아는 눈빛

사람은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키운다는 입장이 되면 상대의 마음을 바라보기보다는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이 드나 보다. 힘을 조금만 빼어도 사실 많은 것들을 배울  있다. 그게 식물이든 동물이든 어린 아이이든. 


집에는 강아지  마리가 산다. 털은 태생이 곱슬이어서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지저분한 모습이 마치 길거리  잃은 강아지와 흡사해진다. 털은 눈부신  백색이면 좋겠지만  끝이 누리끼끼한게 차라리 갈색이면 어땟을까 생각이 든다. 종은 흔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키우는 말티즈이다.


  말티즈를 선호해서 집에 데리고   아니었다. 애절한 듯한 눈빛과 마주치면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이라지. 이끌리듯  만남에 데리고 와버렸다. 


아이는 이미 내가 키운  만으로 8년이 조금 못되었다. 그러나 나이는 1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 맞다. 정확한 나이를 모를뿐더러 의사들이 추정하는 나이일 뿐이다. 이름은 '딸기'.


 며칠 딸기가  아팠다. 설사를 하루에도  번을 해대고 잠만 잤다. 나이가 들어 잠이 많아진 탓도 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아빠가 와도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 집이라고 해봐야 방석 위거나  가방 안에 들어가는  전부이지만) 종일을 나오지 않고 설사 하고 바로  잠만 잤다.    사료를 남편이 먹였는데 속이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물만 주며 상태를 살피고  중이었다. 


옆에서 딸기를 쓰다듬으며 나를 쫓아온 세월 앞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국에 혼자 살며  번의 이사를 함께 감당하고, 그리고 급기야는 미국까지 14시간의 비행마저 함께했던 아이다.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사람들 안에 일일이 적응하며 말이다. 그런 딸기가 지금은 사람의 나이로 칠십에 들어섰다. 추정의 나이이지만 할머니가   사실이다. 어린 나이부터 나보다  고진 세월을 감당했던 딸기에게 나는 배울 것이 많았다.


아이는 번식견이었다. 아파서 버려진 아이였고, 천호동의 어느 동물 병원 의사 선생님이 아이를 살렸다. 병명은 심장사상충 3기였다. 대부분  정도면 "준비하셔야겠습니다."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이는  소망을 잃지 않았다. 아플 때에도. 버려졌을 때에도. 그래서인지 고통에 대해   아는 눈빛이다.


이름도 없고 허가도 나지 않은 변변찮은 번신장에 갇힌 채 새끼만 번식했던 강아지가 어떻게 스스로 생명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을까. 아픈 걸 담담히 이겨낸 딸기 앞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래서 힘들 때면 이 아이의 견딤을 오래 바라보았다. 웬만해서는 사는 게 고난이 아닐 것이다. 이 정도의 힘듦은 충분히 지나가고도 남는다, 는 자세가 나에게 스미는 걸 느꼈다.


그런 커다란 걸 선물로 준 아이가 처음으로 오래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고 잠만 잤다.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딸기가 좋아하는 맛난 걸 먹이지도 못하니 차라리 산책이라도 갈까 생각했지만 밥도 먹지 않은 아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나갈까 살짝 걱정도 되었다.

아, 그래서 강아지 유모차가 있을 수 있겠구나!


내가 처음 강아지 유모차를 본 건 딸기를 키우며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 강아지 용품에 관심이 없던 내가 딸기를 직접 키우며 이것저것을 마구 검색하며 사들일 때였다. 그러나 유모차는 아니었다.

'그걸 왜 태워? 그건 너무 사치 아냐? 사람 아기 유모차도 아니고 아무리 반려동물이어도 그렇지. 그건 좀 아니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내가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한 건 반려견 유모차를 소개하는 글을 쓸 때였다. 아픈 강아지에게도 필요할 수 있겠구나 뭐 그 정도였지 큰 공감을 가지고 쓰지는 못했다.


막상 딸기가 아프니 바깥바람이라도 쏘게  주고 싶은 마음이 바로 그런 유모차였음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자주 산책이나 하지  이럴  미안한 마음이 몰리는  뭘까. 


집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먹는 음식들을 바닥에 덩이채로 흘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게 고기라면 다행이지만 초콜릿이라든지 포도알이라든지 그러면 상황은 곤란해진다. 강아지에게 해가 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식탁 위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으면, 딸기는 뭐라도 떨어지는   주어 먹어볼까 해서  밑을 자주 어슬렁거린다. 아마 설사의 이유는  먹을 것을 먹은 이유일 수도 있다. 처음으로 미용을 아는 (그루밍 ) 맡기느라 딸기를 미용 후에도 반나절 기다리게 했다. 찾으러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때문인 가도 싶고. 여러 가지 의혹이 찾아왔지만 이거다 싶은  모르겠다.


아프니 병원을 가볼까, 하는 마음을 알아챘는지 오후가 되어 어슬렁 거실로 기어 나왔다. 뭐라도 먹으려고 코를 바닥에 대고 킁킁거리는 모습이 다행이다, 싶었다.


오랜 세월을 내 옆에서 함께 지내와 준 아이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그게 글이든 나만 보는 일기장이든 간에. 어쨌거나 글은 글이지 싶다.


무언가를 키우는 일은 책임감이 깃든다.

사람인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렇고 반려동물도 그렇고. 그렇다고 키우는 사람이 절대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다. 완벽한 것도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가르치는 입장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키우며 알았다. 이들을 통해 내가 터득하고 배우는 것 또한 넘치게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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