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앤 Nov 23. 2021

로뎀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말로만 많이 들었다. 로뎀나무.

 카페의 이름이기도 하고, 어느 동물 병원의 이름이기도 하다. 성경 속에 이 로뎀나무가 등장하기도 한다. 엘리야가 나오는 열왕기상을 읽다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고 먹이고 또 재운 후 깨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문득 정말 문득, 도대체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성경에 등장하는 싯딤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종려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통 나무의 생김새가 궁금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름도 예쁜 로뎀이라니. 왠지 낭만적인 이름 같지 않은가. 물론 엘리야가 처한 상황은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다. 그저 힘겹고 지쳤고 쓸쓸하며 두렵다. 그렇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갔던 그가 이세벨의 위협 같은  말 한마디에 세상 비겁하고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니.


 우리도 그렇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펀치를 맞고 평소의 내가 아닌 모습으로 돌변한다. 횡설수설한다. 복구할 수 없는 말로 실수들을 연발한다.

 

 그 펀치는 내 내면의 찔림일 수도 있고, 원하는 무엇을 앞두고 꼭 이루어야만 하는 욕심일 수도 있다. 최근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인물이 있다. 헛소리를 하고,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의 실수를 연거푸 하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남편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에 가면 그를 한 번 꼭 만나볼 거라고 했다. 그러나 어제 남편이 말했다.


 “나, 그 사람 안 봐도 될 것 같아.”

 

 뭐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것도 아니고, 측근을 통해 겸사겸사 연결로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혼자 장구치고 북 쳤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그 인물도 이 로뎀나무 아래에서의 쉼이 좀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그러면 토닥토닥 누군가가 그를 안아 먹이고 재웠을 수도 있게 말이다.


 때로는 힘을 빼야 할 때도 있지만 힘을 내야 할 때도 있다. 모든 게 힘이 들어가 빼야 하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힘내!’


 이런 말이 마치 천덕꾸러기처럼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다. 자기는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다 대고 힘내, 라는 말은 어쩐지 잔인해 보인다고 할까.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다른 의미의 뉘앙스를 준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알기에 정말 생수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음.. 예를 들면 이런 뜻?

 

 '마음을 다시 리셋해봐, 내가 너 위로해, 따뜻한 말 건네고 싶어, 넌 할 수 있어. 내 마음 알지?'


 이런 유의 종합적인 말이라고 하면 좀 오버인가? 아무튼 내게는 이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말을 하고 나니 몸은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정말 한국인이 맞다는 생각에 피식 혼자 웃어본다. 숨은 뜻을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뜨거운 걸 들이켜고도 ‘아, 시원해!’라고 말할 수 있는 국민이니까. 또 그 말뜻을 바로 알아채고 얼른 뒤따라 꿀꺽 삼키며 최고라고 엄지손을 치켜세우는 국민!


 나는 아까 로뎀나무 이야기를 했다. 그 생김새가 궁금하다고. 검색해 본 결과 이미지를 보고 나서 푸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다. 딱 이 여사(엄마)의 머리카락이 생각나서였다. 아침이면 부스스 일어나 화장실 가는 그녀의 뒤통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만지면 바스락거리며 떨어질 것 같고 듬성듬성 난 머리카락이 파마로 인해 잔뜩 손상되어 사방으로 날리는 모습.

 

 아, 내가 생각했던 로뎀의 모습은 아니었다. 크기라도 했으면(백과사전에서는 크게 자라는 관목, 이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한 크기는 아니었으므로). 이건 뭐 세 살 난 우리 아들 말투로 ‘째깐해서” 별 볼일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막에서 자랐다는 특징을 생각해 보면 또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그럴만한 사정’으로 말이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듯이 나무도 생명이니 나름의 사정으로 그리되었을게다. 그럴 법도 하다. 물 부족으로 건조하게 자라야만 했을 테고, 뜨거운 태양 아래 버텨 야만 했을 테고, 또 밤이면 몸이 다 닳아 날아갈 듯 춥고, 가끔은 바람을 견디기도 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세월을 이기고 견딘 나무 아래에서 인생의 고되고 두렵고 아픈 세월을 놓는 일(죽음이 아닌 해결을 보고 싶어 하는 간절의 마음) 앞에 쉼을 우리는 가끔 가져야만 한다.(선지자 엘리야는 마음의 빈 틈을 타 두려움이 장악했던 인간의 나약함을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인간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위로받을 수 있고, 허덕이며 뛴 바쁨 속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들을 수 있는 귀도 생기기 때문이다.


 아, 나는 이제 로뎀나무가 막 좋아지려고 한다. 그 나무 아래 고요히 나를 챙기는 신의 손길을 가만히 느껴보고 싶다. 스스로 만든 절망이라고 해도 꾸짖음 없이 그 끝에서 고요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싶다. 마치 '힘 내'와 같은.  





작가의 이전글 상실의 시대에서 떠올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