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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앤 Dec 01. 2021

엄마의 서재에서

 3미터가 조금 못 되는 길이의 책장이 이 여사(엄마)의 서재에 있다. 이 방은 남아도는 식탁을 놓아 책상처럼 쓰는 곳인데 책이 많은 까닭에 제법 서재 같아 보인다. 이 여사도 그곳을 본인의 서재라고 말한다.


 나는 미국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아이와 한국의 친정집에 와있다. 아이가 잠들고 그 서재의 책들을 찬찬히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사실 서재를 갖는다는 것은 나의 미래 로망이기도 하다. 길이도 넓고 키가 큰 책장을 두세 개쯤 놓아서 빽빽이 책으로 채우고 싶은 꿈. 그 꿈의 3분의 1을 대충 갖춘 곳이 이 여사의 서재였다.


 그곳에서 익숙한 이름의 시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아주 오래되어 누렇게 겉표지가 닳은 얇은 책이었는데, 그 안에 겹겹이 무얼 그리 끼어 놓았는지 두툼했다. 이 시집은 오래전 내 것이었다.

 

 칼릴 지브란과 메리 해스켈의 영혼의 속삭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책인데 겉표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위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첫 장을 넘기니 역시나 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마 16살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절 내 친구가 나에게 보낸 책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글귀도 있었다. '맑고 깨끗한 웃음'이라고.


 그 친구는 나에게 그런 미소를 가졌다고 쓰며 우리들의 깨끗한 우정이 변치 않기를 바란다, 고 덧붙였다. 물론 우리의 그 기가 막힌 우정은 기억 속에 있을 뿐이다. 세월을 생각하니 오래다. 그 시절 나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까마득해서 기억을 더듬기도 힘든 시간이 지나갔다.

 

 책장을 넘기니 책갈피 곳곳에 또 다른 친구의 메모가 수두룩하게 나왔다. 일일이 꼬깃하게 잘 접은 메모장을 피노라니 잊힌 세월을 피는 것만 같아 마음도 함께 설레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들이었다. 물론 그 일부가 이 책갈피 속 곳곳에 간직된 것인데, 유독 한 아이의 메모가 많았다. 지금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며 살고 있을까, 제일 먼저 궁금했다. 그게 남편이든 자녀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말이다.


 나는 그녀의 소식을 모른다. 나보다 더 일찍 미국 서부로 건너가 학교의 첫 수업을 들으며 보낸 엽서도 그 시집에 꽂아져 있었다. 잊힌 기억들이 하나 둘 소생되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다. 나는 그녀를 2001년에 엘에이에서 보았다. 그게 마지막이었고, 내가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우편으로 보내는 걸 끝으로 우리는 서서히 잊어갔다. 아마 그녀도 나를 서서히 잊어갔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점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면서 였다니.


 나는 그 친구가 가진 태도가 무엇이었을까 내내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먼 타국에서 만났던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짧은 여행을 끝내고 내가 사는 버지니아로 돌아와서는 그 궁금증에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 아직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어쨌든 돌아오자마자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현상하고 그걸 아무 메모 없이 보내는 걸로 끝을 맺었었다. 그녀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사진을 잘 받았다거나 하는.


 얼마 전에 김경일 인지 심리학자의 유튜브를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소 친하던 한 사람을 많은 사람들 가운데 홀로 앉혀두는 일에 관하여. 그건 ‘질투’의 심리라고 설명했다. 그 심리학자의 말이 맞다면 그 당시 질투란 게 무엇이었을까. 잠시 이유를  생각했지만 곧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의 쪽지를 이렇게 또 마주하다니.


 생각해보니 우린 꽤 친했던 게 맞았나 의구심이 들었다. 무수한 쪽지가 오고 가긴 했지만 그건 스스로를 향한 돌파구 같은 글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저 십 대의 마지막 시절을 보내며 소녀감성의 글들을 주옥 같이 쏟아내고 주거니 받거니 삶을 이야기한 게 아니었는가 말이다. 그게 무엇이었든 우리는 성장했고, 다른 방향의 삶을 보며 서서히 멀어져 간 것뿐일 수도 있다.


 메모를 피고 접으며, 내 추억도 이 시집 안에서 꽃처럼 피었다 졌다.

 시집을 선물한 또 다른 친구의 글처럼 맑고 깨끗한 우정이 그저 기억 속에 오래 간직되면 그것으로 되었다 싶다. 우리는 그 시절,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 작아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니 졸업앨범부터 쾌쾌 묵은 서적까지 이 여사의 서재는 어마어마한 걸 담고 묵묵히 침묵하며 기다린 보물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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