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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앤 Feb 18. 2022

어쩌다 육아

 어쩌다,를 사전에서 찾았다. ‘우연히, 뜻밖의’라는 풀이가 내가 찾던 그 의미와 가장 적합했다. 그래, 나는 어쩌다 이 나이에 육아를 하게 된 걸까. 답은 뭐 심플하다. 늦게 낳게 되었으니까!


 나의 육아 3년은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 나는 엄청난 인내가 생겼다. 나의 공간, 나의 시간에 대해 허락하지 않은 누군가가 마음대로 침범하는 것에 대해 예민했던 나였다. 누군들 그게 쉬웠을까. 하지만 엄마는 안다. 엄마가 되어 본 사람들은 안다. ‘나'라는 자신을 시시때때로 내려놔야 한다는 것을.


 아이가 태어나고 나를 시험하려는 듯 이삼일 후부터 그 인내는 시작되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마냥 신기해할 시간은 짧았다. 모든 책임은 그때부터 나에게 떡하니 주어졌다. 그것도 아주 무겁게. 커다란 납덩어리를 사정없이 내 머리 위로 짓누르는 느낌이랄까. 매일매일의 반복은 맙소사, 이 아이 하나를 위해 나라는 존재 전부를 이렇게 내어주는구나, 싶은 마음에 우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기쁘기보다는 그래서 슬펐다. 이유 없이 그랬다. 호르몬의 문제였으리라. 


 그래도 익숙해질 때쯤 반복되는 삶에서 기쁜 이유도 찾았고, 의미도 찾았다. 다행이다. 이 무게를 못 견디어 냈다면 나는 아마 나쁜 엄마가 되어 있거나, 엄마이기를 포기했을 것 같다. 


 마흔의 시작은 그렇게 새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9개월이라는 임신 기간을 지나고 제왕절개를 경험하고, 아이를 한 번도 키워본 적 없는 내가 엄마라는 이름을 달고 4년을 넘겼다. 나의 마흔은 그랬다. 그 정신없는 기간 동안에도 나는 끊임없이 나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이 아무래도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희망처럼.


 되돌아보면 나는 육아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얻게 된 셈이었다. 처음으로 깊고도 넓게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며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고, 나는 어떤 사람으로 커가며 무엇을 선택하고 살았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그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잘 살아왔다는 자신감보다는 그러지 못한 세월이 많았고, 덜어내야 할 내 안의 상처도 많았다. 서른의 어느 날, 다 비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서툴게 만난 신은 그렇게 오래 나를 만졌고, 자존감으로 조금씩 나를 세우며 살아왔다. 그래도 비워내야 할 무언가가 더 있었다. 한 번의 치유로 다 낫지 않는다는 교훈도 더불어 얻었다.


 어쩌다 육아로 마흔에 접어들었지만, 그 나이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다급하게 이루어진 육아가 아니었다면, 설렁설렁으로 나는 결코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야! 우리 첫째 벌써 대학교 3학년이다. 넌 언제 키우니.”


 동갑내기 친구는 전화기 너머로 그렇게 말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뒤에 호호호 웃는 소리는 그녀만의 통쾌함이 묻어나 있었다. 그 힘든 걸 이 나이에 언제 할래,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허허허 웃었다. 나의 웃음은 ‘뒤늦더라도 나도 육아의 길을 가니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딨니?’라는 의미를 포함했다. 그걸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 뜻밖의 육아로 나는 이제야 성장이라는 그리고 ‘엄마’라는 새 이름을 달고 마흔을 지나가는 중이다. 녹록지만은 않지만 그렇다고 이 현실을 놓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마흔에 늦은 육아를 고민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것도 괜찮다고, 아니 오히려 더 근사한 마흔을 지나갈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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