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앤 Mar 07. 2022

나쁜 일과 좋은 일은 결국엔 하나다

인생을 바게트 빵처럼 길게 뉘어 놓고 보면, 나쁜 일만 있는 사람도 없고, 좋은 일만 있는 사람도 없다. 모두는 동시에 잘 반죽되어 골고루 구워진 빵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빵을 반죽하고 구워보니 그게 인생과 다를 게 뭐가 있냐는 식의 배짱도 생긴다. 빵마다 다른 맛과 식감이 있듯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고. 저마다 독특한 캐릭터로 삶을 살아가고, 그 안에서 서로 맞는 사람끼리 친구가 되고 연인도 된다. 나쁜 일, 좋은 일이 섞여 더 풍부해지는 순간이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 준 적이 있다. 도서관에서 마구잡이로 빌려온 책인데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음에 오래 남았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한 꼬마 아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엄마는 당장에 사주지는 않는다. 그때 막대기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그걸로 아이는 화풀이를 한다. 엄마는 그 막대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혼이 나고 막대기를 집어던진다. 여차저차로 그 바람에 지나가던 아저씨의 새 양복이 진흙으로 범벅이 된다. 아저씨는 기분 좋은 일로 양복을 입었던 건데 한숨을 쉬며 세탁소로 향한다. 거기서 세탁소 주인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이 생긴다. 아이는 엄마를 잘 기다려준 덕분에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다. 세상에 이런 행복은 없다. 한 입 먹으려는 순간, 아이스크림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허무하다.


왜 이 그림책이 내내 인상에 남았을까.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있어주면 좋으련만 결코 그러는 법이 없다. 화풀이 대상으로 발견한 막대기는 아이에게는 '좋은 일'에 속했다. 괜한 걸 탁탁 치고 다니며 자신의 화를 풀었건만, 그걸로 다시 엄마에게 혼이 나는 아이. 결국 휙, 하고 집어던지고 만다. 한 남자는 오늘 기분이 좋다. 양복까지 잘 차려입고 길을 가던 중 막대기로 인해 옷을 망치게 된다. 나쁜 일이다. 급히 세탁소를 찾아 들어갔는데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책의 끝에서는 그 둘이 결혼을 한다. 좋은 일이다.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 속에 이런 심오한 인생의 본질이 숨겨져 있다니! 아무래도 저자는 책을 읽어주는 어른에게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신도 깨닫고, 또 이런 세상을 아이에게도 말해주면 좋겠다, 고. 


<소원을 이루는 완벽한 방법>에서 11살 찰리도 마찬가지다. 쌈닭처럼 싸우는 아버지와 우울증을 겪는 엄마를 둔 아이이지만 해맑은 찰리는 복지사의 제안으로 낯선 이모집으로 보내지게 된다. 그 첫날밤의 어색함은 찰리에게 어땠을까. 아마 불안함과 예민함에 그건 나쁜 일에 속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노스캐롤라이나의 이모집에서의 생활은 결국 좋은 일이 되어 찰리에게 돌아온다. 한 아이의 성장과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또 다르게 보면 결국 나쁜 일과 좋은 일은 하나구나, 깨닫게 된다. 


오래전 카페 투어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카페를 운영할 마음이 있다든지 커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카페 방문을 하는 투어 모임이다. 운영자의 말로는 카페 투어를 마치며 "저는 커피를 안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카페를 하다가 중간에 "저, 안 하려고요. 문 닫습니다" 했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는 투어만으로 자기가 가졌던 생각이 그저 꿈이었다는 것을 현실로 알았다고 했다. 그건 분명 좋은 일이다. 


이쯤 되니 꼭 이분법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가르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좋은 일은 안 좋은 일로도 이루어지지만 그게 또 딱히 안 좋다, 나쁘다로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에 더 좋은 걸 만나기 위한 연습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지나고 보면 그렇다. 그래서 결국은 인생에 나쁜 일이란 없다. 좋은 일이라고 폴짝 뛸 일은 하루면 족하다. 그걸로 교만해질 필요도 없고, 오래 도취되어도 좋지 않으니까. 


그저 행복 한 줌 한 줌 주어서 그때그때 기뻐하는 삶, 감사하는 삶이라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인생에 좋지 않다고 느껴지는 일이 내게 온다면, 언어의 마법을 걸어 보는 건 어떨까? 

"이 일은 나중에 더 좋게 나에게 되돌아올 거야." 혹은 "더 심하지 않은 게 무척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려 했더니 그건 너무 심심해 보인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 중에 들은 말이 있는데 이건 어떨까? 


"우박이 만나가 된다."


돈 없는 학생 시절, 낡은 중고차에 커다락 우박이 떨어져 창문도 금가고 차에 덴트가 많이 났었단다. 다음 날 보험 처리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수리센터에 갔더니 삼 천불 체크를 보험회사에서 보내옴! 차는 오천 불을 주고 산 것이었다고. 우박이 만나가 되는 순간을 목격했단다.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뒷이야기: 차의 덴트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던 날 스스로 올라와 정상으로 바뀌었단다.) 


어느 책에서 '고집'에 대해 읽었던 게 생각난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 꼭 지켜야만 하는 버릇 같은 고집! 라면을 끓일 때 수프 먼저 넣어야 하는 그런 고집. (저자는 그렇게 표현했다. 아하! 쉽게 감이 오지 않는가?)


나도 한 번 그런 고집으로 내 인생에 오는 모든 일을 긍정의 언어로 마법을 걸어볼 것이다. 당신도 동참하지 않겠는가? "우박이 만나가 된다!" 


어쨌든 삶의 모든 일은 섞이어 하나로 이어질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심야식당2 에서는 왜 혼밥도 함께가 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