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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May 28. 2022

나의 꽃밭은 어디에?


나는 일본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일본 여류작가들(다나베 세이코, 에쿠니 가오리 등)의 소설은 거의 전권을 구매해서 심심할 때마다 읽는다. (제일 좋아하는 건 단연 다나베 세이코다.) 읽다 보면 특정한 문장이 꼭 내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것 같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한국문학이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나라 소설은 어떤 걸 읽던지 공감이 잘 안 간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안 읽힌다.) 서양문학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현대 여성의 심리와 인간관계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세심한 문장력에 감탄할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 일본 여성들을 보면 우리나라 여성들보다 훨씬 자기표현에 소극적이고 '여자다워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 보이는데(우리나라도 물론 만만치는 않지만, 양상이 다르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오히려 여류작가들의 문학에 일종의 '인생에 대한 해탈'이 깃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등장인물을 향한 연민과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진다.


공강 시간에 짬을 내서 학교 도서관에서 야마모토 후미오의 <플라나리아>라는 소설을 집어 들었다. 이 소설에는 유방암을 앓은 전적이 있는 30대 초반의 백수 여자가 나오는데,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자격미달'의 인생이다.


그녀 스스로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자존감이 낮고 자기 비하가 심하다. 유방암이 걸렸을 때도 곁에 있어준 연하의 남자 친구가 있지만 그 역시 그녀에게 이상적인 여자 친구의 모습을, 연기하기를 요구한다.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얻을 게 있으니 유지되는 관계이다. 가족과 친구들은 아무 일이든 하라며 그녀를 몰아붙인다. 그런 그녀는 인간이 아닌 플라나리아가 되고 싶다고 진담같은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 플라나리아: 잘라도 계속해서 재생가능한 무척추동물. 징그러워서 사진은 첨부하지 않음.


플라나리아 대신 느긋한 고양이가 되고싶기는 하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주변 사람들에게 가스 라이팅, 내지는 '너를 위한 조언'을 들으며 꿋꿋이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덤덤하게 그려낸 문체에, 나는 왠지 위로를 받았다.


물론, 나는 직업도 있고, 아직 병은 없고 건강하지만 <사회의 기준을 의식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며, 안 좋은 인간관계들로 스트레스받는 주인공의 모습>이 많이 공감되었다.


불과 몇 년 전의 내 모습과 상당히 흡사했다.

, 지금도 완전히 아니라곤 할 수 없다마는.


소설 서문에 작가의 말이 왠지 가슴에 꽂혔다.


누구나 특정 인생 시기에, 저마다의 꽃을 피워내며 살아간다. <나는 미혼의 직장여성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회사(학교)라는 꽃밭... 시들어버렸다> 단계에 생각보다 빨리 도달한 것 같은데, 이제 어떤 꽃을 심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고싶은 일은 많지만,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플라나리아'가 되고 싶은 것은 실히 아니다.


나의 꽃밭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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