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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Feb 11. 2022

적당한 가식은 이롭다

온전한 나를 인정받고 싶은 환상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으로 작년에 여러 가지 인간관계에 관한 글을 썼었다. 사람을 잘 믿지 않게 되었고, 친절한 사람들이 뒤통수를 치는 것을 많이 보았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의 본성이 잘 캐치가 되다 보니 사람들하고 심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언제나 항상, 그랬듯이.


그런데 이번 달에 들어서 그런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을 잘 믿지는 않지만, 여러 사람들과 직간접적으로 교류를 많이 하면서(요즘은 줌 스터디 등으로 온라인을 활용하여 사람들과 교류가 늘었다) '결이 맞는' 사람들과 '적당한 가식'을 가지고 교류를 하는 것이 참 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말하는 '가식'이란, 나를 꾸미는 것이 아닌 긴밀하게 친하지 않은 관계에서 다 오픈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서로 소통하는 것이 가볍고 더욱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에 <약한 유대관계의 힘>이라는 용어가 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약한 유대 관계의 힘: 1973년 스탠퍼드대학 사회학과의 마크 그래 노베터 교수는 '약한 유대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개인의 행복과 정보 습득이 나와 친한 사람보다 적당히 알고 지내는 '약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들에게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적당히 몰랐을 때는, 사실 많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 기대할 것이 없고 좋은 점만 보게 되지만, 가깝게 지내다 보면 많은 것이 보이기 때문에 단점 위주로 보이게 된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사람에 대한 촉과 판단력이 빠르기 때문에 한번 괜찮은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이 유지되고, 한번 아니라고 판단되면 거의 끝까지 가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인상을 보고 성격을 판단할 때도 많다ㅎㅎ 맞을 때도 많기 때문에 더 확신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표준에서 벗어난 사람, 음흉하거나 특이한 사람은 거의 맞다.)


나만의 직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나의 틀을 쌓아가는 것이다. (벽일 수도 있고) 여하튼, 문제는 사람은 누구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장점이 단점이고, 단점이 장점이다.


이것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확실한 것을 좋아하고 요령을 잘 피우지 않고, 지나치게 올곧음을 추구하고 내 기준을 맞추려는 성격이다 보니 사람에 대해서도 '주관적인 결벽증'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발현되면, 내 기준에 맞는 사람들만 좋아하게 되는데,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항상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의 기준에 맞는 사람, 완벽한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온전한 나'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 자신도 이중성이 있는 인간인데, '나는 항상 바르고, 정직하다, 혹은 나름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틀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을 깨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그것을 타인에게 갖다 댄 것은 아닌지. 타인은 결국 나를 비추는 거울이므로, 나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관념을 유지시켜 줄 사람이 필요하니깐. 거기에 맞지 않는 사람은 불편하니깐.


가식을 잘 부리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온전한 나를 인정'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있는 그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가식을 부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적당한 가식이라는 것이 '사람 간의 소통'을 더욱 유리하게 할 수도 있다.


오늘 내가 존경하는 부장 선생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반에서 소외된 두 명의 학생이 있는데, 아이들이 선생님에게는 알랑거리고 뒤에서는 친구들끼리 욕을 하고 그런 이중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계속 친구들을 싫어하고 고립되고 있다고.


그때 사실, 이 글을 쓰기로 결심을 했다.


그 반에서 소외된 두 명의 학생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마음'은 '소통의 결핍이나 거부'에서 올지도 모른다. 또는 '자신들을 온전히 인정받고 싶은 고집'일지도 모른다. 그런 고집이 세고 고독한 기질이 내 안에도 똑같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그것도 그들의 개성일 수도, 장점일 수도 있지만.


부장님은 수업 중에 아이들에게 자신의 단점을 먼저 오픈하고, 나도 이런 점을 고치고 싶다. 너희는 고치고 싶은 성격의 단점이 뭐냐고 솔직하게 물어봤다고 한다.(물론 의도된 질문이다ㅋ)


유독 그 두 명의 학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청을 했다고 한다. 마음을 연 것이다.


그 아이들은 그런 자신 안의 고립된 마음을 그저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싫은 마음, 반에서 소외된 마음, 그리고 그런 고집을 싫어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내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통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부장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의도를 가진 가식이 아닌, 타인과 나의 관계를 부담스럽지 않고 가벼우며 즐겁게 만드는 '가식'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친한 관계에서도 어쩌면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고.


'온전한 나'가 있다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도 '온전한 타인'이 있다는 것인데,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오히려 '온전하지 않은 타인'들만 눈에 들어오게 된다. 사람들은 다양한 측면이 있다.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으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조정'하고 '갈등'하고 '서로 적당한 도움과 피해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는, 그게 너무 싫었던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과 피해를 감수해야 하며 나의 '이중성'과 '온전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예 거리를 두면 '온전한 나'도 지킬 수 있고 세상을 나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나누어 나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 상처입지 않아도 된다. 나를 지킬 수 있다.  


나를 그 틀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마도 세상을 바로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나 자신의 단점도, 타인의 단점도 그대로 두며 기꺼이 갈등과 다툼을 감수해가며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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