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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아 Jul 20. 2023

예민한 고양이

친구네 고양이가 TV를 부쉈다

친구네 고양이가 TV를 부쉈다.

잠깐 3일 동안 맡아주는 거였는데, 마지막 날 친구가 오기 30분 전에 일이 터져버렸다. 저녁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려서 뒤돌아보니, TV는 엎어져 있고 냥이가 튀어 오르며 뛰쳐나오고 있었다. 설마 하고 엎어진 TV를 켜보니 이미 사망한 상태. 나는 무지개색이 된 화면을 고무장갑 끼고 몇 분간 멍하니 쳐다보았다.

본인이 사고 친 걸 아는지 나를 빤히 보며 주위를 맴도는 고양이. 눈치 보던 냥이가 괜히 이빨을 드러내고 내 발목을 향해 입을 벌린다. 뻘쭘한 마음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게 왠지 내 옛날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 고양이는 첫날부터 예민한 게 느껴졌다. 집사가 떠나자 활발했던 것도 잠시, 낯선 공간에 놓였다는 걸 바로 알아채곤 나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던 것이다. 오후에 할 일을 대충 마무리 짓고 냥이를 보러 나왔는데, 어딜 갔는지 집에 보이질 않았다. 드레스룸을 열어서 찾아보니 저 깊은 옷가지 사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 숨어있다. 거기서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보다 마지못해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고양이. 그 뒤로 내가 무서운 건지 냥이는 드레스룸 구석에서 계속 자다 깨다만 반복했다.

밤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거실 쪽을 나가보았다. 카펫에 고양이가 토를 하고 있었다. 그 후로 3번이나 더 구수한 냄새나는 토를 해서 친구에게 급하게 전화했더니, 원래 토를 잘하지 않는 애인데... 하며 말끝을 흐린다.

낯선 공간에 티비를 박살내고 카펫에 여러 번 토를 한 사고뭉치 고양이. 하지만 나는 왠지 안쓰러운 생각만 들뿐이었다. 너도 나처럼 세상 살기 힘들겠구나, 예민해서.

자소서에 나를 고양이에 비유해 써서 낸 적이 있다.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래거나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걸 바로 캐치해 내고, 고고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그 자태가 나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제로 나는 남들보다 두 배로 놀래서, 혼자 소리 지르는 게 민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 심장이 아프도록 놀래는데 상대방은 무덤덤한 걸 보고 내가 청각이 예민하다는 걸 알았다. 같은 노래를 들어도 그 울림이 나에겐 더 크게 다가왔고, 남들은 지루하다는 선율에 깊이 빠져 밤을 지새웠다.

음악이 술이라면 영화는 내게 마약이었다. 영상, 음악, 미술의 총집합체의 프레임이 내게 쏟아지는 그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일주일 내내 울기도 하고, 심지어 프로듀스101을 보면서도 눈물이 줄줄이었는데 이게 예민함 테스트지의 1번 항목이라는 걸 인터넷 보다가 알았다.

요즘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온 초민감자(empath) 테스트가 인터넷에서 자주 뜬다. 초민감자란 지나친 공감 능력 때문에 같은 사건을 겪어도 감정적으로 더 많이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아래 항목에 15개 이상이면 완전한 초민감자에 해당된다. 나는 예상대로 14개 체크되어 엠패스 성향이 강하다고 판정받았다.

11-15개 : 초민감자의 성향이 강함 / 15개 이상 : 완전한 초민감자


회사라는 새로운 환경에 던져지고 나면, 초민감자들은 철저히 페르소나를 쓰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보통 '예민한 사람'이라고 하면 사소한 말에 민감하게 받아치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인식을 하지만, 그건 오해다. 진짜로 예민한 사람은 나의 기분을 드러냈을 때 상대방이 받는 대미지까지 같이 공감해 버리기 때문에, 자신의 예민함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민함을 꽁꽁 숨기고 사회적 가면을 써버리기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굉장히 무던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어느 날, 대학동기와 오랜만에 카페에서 만났더니 고민을 털어놓았다.

"회사에서 나는 완전 다른 성격이 돼버려. 내 원래 성격이 잘 나오지 않는달까."

굉장히 마이웨이에 기가 센 스타일의 친구가 털어놓은 의외의 고민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살짝 들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직급이라는 새로운 계급질서가 존재하고, 진급과 인사평가를 위해 '나'가 아닌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상의 나'로 변해야 하는 필요가 있다.

상사의 지시에는 내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웬만하면 넘겨야 하고, 의견을 피력할 때는 완곡한 표현을 써 신경을 거슬리지 않게 해야 한다. 한 번씩 터지는 엿같은 상황에 책상을 쓸어버리고 싶어도, 겉으로는 침착하고 무던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원처럼 보여야 한다. 그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성 있고 눈치 있는' 회사원의 자세다.

예민한 성향인 사람에게 출근한 동료들의 상태를 쫙 체크하는 건 쉬운 일이다. 대각선 주임은 아침부터 외주사 때문에 빡이 친 것 같고, 옆자리 동기는 오늘 기분 좋은 거 보니 남친이랑 화해했나 보다. 저 멀리 팀장님은 신입한데 계속 돌려 멕이고 있으니 오늘 몸 사려야겠고, 목소리 큰 대리는 오늘도 누구와 통화로 싸운다.

이 모든 상태를 다 파악하고 있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마우스만 딸깍 댈 뿐이다. 그러다 중요한 상황이 올 때 한 번씩 수집된 데이터 중 하나의 카드를 제출함으로써, 상대방에게 호의를 받거나 의외의 공격을 줄 수 있다.

점점 페르소나가 많아지면서, 나는 나로서 존립하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남들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말들은 들쑥날쑥이고 내가 생각하는 나와의 간극이 벌어졌다.

 "세아 너는 원래 말을 안 하잖아."
 "세아님 당연히 E 아니었어요? 말빨도 세고 낯가림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네가 텐션이 낮은걸 내가 아는데, 왜 굳이 텐션을 맞춰주지 하는 의문이 있었지."
 "넌 고등학교 때도 아예 우울하거나 아님 기분이 너무 좋거나 해서 또라이였어."

가끔 듣는 '내가 아닌 나'에 대한 평가는 짜증을 확 치솟게 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나 싶으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남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사이에서. 20대는 자아 정체성에 대해 파도가 치는 시기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데, 어떤 것들을 육지로 올려 두 발을 딛게 할 수 있을까.

모든 정답은 내 안에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가 진짜 나일 수밖에 없다. 남은 나를 매 순간 매초 생각하지 않고, 나는 나를 생각하기에 고로 존재한다. 상대방이 보는 나도 물론 나의 일부분일 수 있다. 그것은 상대방의 여러 주관적 사고들이 섞인 판단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내가 6살에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나의 평생 스토리를 알 수는 없다.

나는 보라색과 스시를 좋아하고, 따뜻해 보이지만 속은 예민하고 서늘한 면이 있다. 때때로 광인처럼 굴며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하며 엉뚱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지만 현실적인 말들을 내뱉는다. 남이 나에게 "너는 초록색을 좋아하잖아"라고 한다한들 내가 초록색을 좋아한다고 헷갈릴 필요는 없다. 나는 여전히 보라색을 좋아하고,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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