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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아 Jul 07. 2023

번아웃과 방광염

내가 퇴사해야만 했던 이유들



 그날은 새벽 2시까지 야근한 다음날이었다. 감독님 파이널 미팅날이었고, 더 이상 올 전화가 없는 상황이어야 함에도 아침부터 전화는 불티나게 울렸다.

 "급하게 전화드리지만, 이것들만 좀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렇게 데드라인 넘기시면 저희도 곤란해요.."
 "네... 근데 수정은 금방 되지 않나요?"

몇 달 전부터 계속된 외주사와의 저 의미 없는 논쟁에 나는 한숨 쉬며 전화를 끊었다. 지금 논쟁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3층으로 달려갔고, 이 회사 건물에서 가장 많이 뛰어다니는 사람은 분명히 나일 거라는 확신에 찬 생각을 또 하며 뛰었다.

헐떡거리며 다니다 잠시 배가 아파 화장실에 들렀다.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엄청난 고통이 몰려와 깜짝 놀라 아래를 보았다. 생리도 아닌데 피가 나고 있었다.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이 업무를 하던 내게 방광염이 온 것이었다.

 방광염은 내가 이때까지 겪은 것 중에 가장 최악인 질병이었다. 하루종일 소변이 남아있는 듯한 잔뇨감에 화장실을 붙잡고 있어야 했고, 찌릿하고 감전되는 듯한 고통에 소변 누는 일상적인 행위 자체가 공포스러워졌다.


결국 반차를 쓰고 혼자 산부인과에 갔다. 염증이 너무 심하다며 의사는 수액을 몇 시간 맞고 가라고 했다. 평일 오전 고요한 병실에서 수액을 맞으며 누워있던 나는 병실 천장을 보자 눈물이 흘러버렸다. 주머니 속에는 업무카톡만이 징징대며 계속 울릴 뿐이었다.

번아웃이 오기 전에는 몇 번의 트리거가 있다. 나에게는 방광염이 마지막 트리거였고 그날 이후, 퇴사를 고민했던 마음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처음 트리거는 연차에 비해 과중한 업무에서 시작되었다.
입사한 지 2년도 채 안 된 무렵, 주변에 퇴사자가 많고 맡을 적임자가 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프로젝트를 메인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적임자가 없다면 경력직을 뽑거나, 상사가 책임지고 프로젝트를 맡아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당시 회사는 저연차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그리고 나조차도 이 영화를 담당해 개봉시키면 빠르게 승진할 것 같았고,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괴이한 욕심이 생겼었다.

덜컥 제안을 받아들인 지 몇 달 뒤, 프로젝트는 모두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회의 시간에 상사와 동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몇 개월동안 갈린 나는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업무 난이도 증가에 매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업무에 대한 질문을 할 선임도 없었고, 일처리 시간은 배로 늘어갔다. 나는 점점 날 서고 불안한 인간이 되어갔다. 애써 잠든 밤에도 데이터 정리하는 꿈을 꿨다.

어느 순간 머릿속 말이 잘 안 떠오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는 이유를 모른 채 말이 왜 매끄럽게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당시 업무에 대한 부담감과 압박감이 커 공황장애 비슷한 증상이 온 것 같다. 그날도 매일같이 열리던 회의에 참석했는데,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내가 발표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목이 떨리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사 전 대학생 시절의 나는 조장을 도맡아 하고, 대외활동에서 수많은 발표를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런 내가 발표를 절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무리해 버리고 적정량 이상의 업무를 감내해 말 그대로 번아웃이 되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두 번째 방아쇠는 연차가 쌓일수록 이 일이 내 일이 아니다는 확신이 들면서부터였다. 사실 내가 원했던 일은 나의 생각과 감정을 어떤 미디어로든 창작해 결과물을 만드는 거였지만, 막상 입사해 보니 상당히 수동적이고 관리 업무 쪽에 가까웠다. 하고 싶었던 영화라는 분야에 몸담은 건 맞지만, 그 속에 가장 중요한 '하는 일'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나 하고 싶은 일은 이게 아니다. 생각이 분명해지자 내가 진실로 원하는 일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퇴사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퇴사 생각은 저변에 깔려있지만, 막상 사직서를 낼만큼의 확신은 서지 않는다는 고민이 많다. 나는 그럴 때마다 지금은 퇴사 때가 아니니 계속 다니라고 조언해 준다. 아직은 일을 다닐만한 무언가의 장점이 붙잡고 있는 것이고, 번아웃을 극복하려는 의욕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 모든 촛불이 꺼졌을 때 고민이 아닌 마지막 퇴사로의 결심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어쩌면 나는 마지막 촛불을 꺼준 방광염에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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