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

by 초동급부

삼철에게.

잘 지냈어? 다친데 아프지는 않고? 밥은 잘 먹는 거야?
은경이는 하루 종일 삼철이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졸린 척 탈의실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비상구 계단에 앉아서 바닥만 쳐다보다 오곤 해.

그러게 넌 왜 사고만 치고 다니는 거야? 언제나 철이 들는지...
그래두 걱정은 마. 내 할 일은 다 하니깐.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지도 않고 졸다가 전화받은 적도 없어. 항상 잠긴 목소리로 전화받으니깐 맨날 졸거나 자는 줄 아는 모양인데. 아냐. 절대루. 진짜야. 맨날 나 보구 잠만 잔다 그러지. 치. 두고 보자. 생각 못했었는데 지금 또 열받네.

며칠만 있으면 설이네. 나흘이나 쉬네. 근데 쉬어도 별루 할 일도 없고. 그저 그래. 집에 있어봐야 잠만 늘고. 요즘은 참 이상하다. 뭘 해두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아. TV를 보다가도 딴생각이고, 음악을 듣다가도 딴생각이고, 책을 모다가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뚜렷한 생각이라도 서 있으면 괜찮으련만 나 조차도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도대체 무슨 생각땜에 모든 일이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는 건지. 정말 한심하구 대책 없구 한마디로 걱정된다. 나 같은 애.

근데 나는 나 같은 애 좋아하는 네가 더 걱정이야.
이 담에 어쩔려구 그래. 그러니까 너무 많이 좋아하지 말고, 너무 많이 마음 주지 말고, 또 나를 너무 많이 보지두 마. 나중을 위해서 또 이런 얘기해서 나 정말 미안하지만 더 널 위해서야. 알았지? 나중에 빼두박두 못하게 돼서 후회하지 말고.(설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네)

설에 뭐하니? 10일부터 13일까지 훈련이랬지?
다쳤는데 훈련까지 받으려면 정말 힘들 거야. 게다가 잠두 제대로 못 잔다며. 그러면 설에는 푹 쉬어. 우리야 공휴일이라고 박혀있어 집에서 편히 쉬지만 군대란 속은 그런 것도 없을 거 아냐. 그래두 쉴만한 시간은 있을 테지? 아무 생각 말고 편히 쉬어. 그래야 빨리 나아서 건강해지지. 알았지? 누나 말 잘 들어. 잘 지내고 있어야 돼? 그래. 그럼 편지 또 쓸게.
잘 있어. 안녕. 다음에 보자.

1999. 2. 9.

P. S. 이 편지와 편지봉투 내가 만든 건데 촌스럽지?
그냥. 매일 똑같은데 쓰는 것두 지겹잖아. 근데 이것두
별 수 없다. 알잖아 내 손재주 없는 걸...


이 편지를 읽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는 빼두박두 못하게 되어 버린 그때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언제였을까?


다 날 위해서였던 그녀의 때 이른 걱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좋아해서 마음을 주었고 수없이 많이 보았으며 결혼에 이르러 현재 초등학교 5학년 아이의 학부모이다. 이에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쓰기에는 무척이나 부적절한 어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 버린 난감한 상황을 뜻하는... 내 인생을 돌아 당 시기를 찾을 수 있다.


답은 어렵지 않게 구했다.

바로 그때, 2011년 말로 기억한다.

'나도 나이가 들었고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네 곁에 있었으면, 인간적으로 이제는 결혼하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그녀가 내게 말했던 그 해 겨울...


그 계절에 비인간적이었던 나는 무척이나 난감했었다.

결혼을 할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원인을 서로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나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인생 최대의 인간적인 결단을 내렸고 어려웠지만 그녀가 원하는 몇몇 절차를 착실히 진행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해결해 준다. 이제는 그 조차도 추억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나는 오늘도 어떤 인간적이지 못한 동을 한다.

내 지난 빼박의 시기와 다르게 진한 후회로 남을 때도 있다. 이 또한 나중에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이나, 나에게 그것이 유한하다는 것만큼 분명한 사실도 없기에 잠든 아이의 얼굴에 내 볼을 살며시 닿아 본다.


짧은 내 삶에서 아빠로서의 삶은 더욱 짧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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