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 중심 vs 경험 중심
두 가지 교육의 큰 화두를 한 가지 글에 버무려보려 한다. 2023년 1학기 봄기운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우리 반 학생들과 함께 의정부 민락동에 있는 송산사지로 현장체험학습을 다녀왔다. 현장체험학습은 보통 학기 초에 계획을 세워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뒤 이루어진다. 사회 교과에서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단원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일은 여러모로 번거로워, 관련 문헌이나 인터넷 누리집 등을 탐색하여 교실에서 조사학습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번거롭다는 말은 단순히 귀찮다는 게 아니라, 현장체험학습을 나가기 위한 절차가 까다롭고 각종 계획 및 회의, 답사, 예산 편성, 학생 안전 문제, 불참 학생 지도계획 등 여러 가지로 생각할 점이 많으므로 업무량이 평소보다 확연히 증가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모든 절차를 아이들의 환한 미소 하나만 떠올리며, 차근차근 밟아가더라도 현장체험학습 당일엔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할 수 없다. 혹시라도 체험학습장에서 안전사고라도 나면 그간의 노력이 빛을 잃기 때문이다.
사전 안전교육을 포함하여 교사가 모든 학생을 매 순간 시야에 두어 사고 예방에 최선을 다하더라도, 사고란 것은 순간적인 현상이기에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교사의 부주의가 아닌 사고에도, 사고에 대한 책임을 학부모가 교사에게 민사소송의 방식으로 물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사례와 판례는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현장체험학습은 교사에게 항상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업무상의 책임 소재를 떠나서 자신의 제자가 다쳤으므로 사고의 정도가 크건 작건 간에 교사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이런 점이 업무량의 증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적 중압감을 준다.
교육대학을 다니던 시절, 교육과정 이론을 가르치셨던 강사님으로부터 현장체험학습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을 들었다. 교육은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져도 충분하다고 하다는 뜻이다. 덧붙여 교과는 중요한 과목과 덜 중요한 과목으로 나뉘며, 철학, 수학, 과학, 역사와 같은 과목이 중요한 과목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그분께서는 교육학이란 학문을 진지하게 탐구하셨고, 자신의 신념을 열정을 바쳐 교직에서 실천하신 분이다. 강사님께서 많은 고민 끝에 그러한 결론을 내리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교육이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현장체험학습은 교실 밖을 벗어나 교실에서는 할 수 없는 아동의 생생한 경험을 중시하는 활동이다. 학생들도 학교를 벗어나 콧바람을 쐬는 것을 좋아한다. 경험으로서의 교육과정은 학생의 경험이 교실 안팎에서 모두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교육과정을 ‘교육내용(content)’으로 규정한다. 이때의 교육과정은 수학, 과학, 역사 등 교사가 가르치고 학생이 배워야 할 교수-학습 내용을 의미한다. 이런 생각이 반영된 교육과정을 ‘교과 중심 교육과정’이라 부른다. 교과 중심 교육과정에서는 지식의 습득과 이성 계발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는다. 지식이 강조되다 보니, 학생보다 지적 측면에서 월등한 교사가 교수-학습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교사 중심의 교육과정으로 수업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며, 아동의 흥미와는 상관없이 지식이나 정보가 효율적으로 교실에서 전수된다.
20세기 초 미국의 교육사상가 듀이와 진보주의 교육철학자들은 ‘교육과정 = 교육내용’이란 등식을 비판한다. 교과는 과거의 축적된 지식의 체계인데, 그것만 강조하는 교육과정 아래서 학생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 상황과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동떨어져 있어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교육과정을 내용이 아니라 교사의 지도하에 학생들이 겪는 모든 경험(experience)이라고 정의했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경험은 꼭 학교에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고 보았고,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교실 안팎 어디든지 교육적인 경험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두 교육과정은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5~6학년이 배우는 사회 과목에서는 역사 영역을 다룬다. 상이한 관점에 따라 역사 수업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교과 중심 교육과정에 따르면 강의식 설명이 주를 이뤄 교사는 학생들에게 역사적 지식을 전달할 것이다. 교실에 있는 학생들이 책을 펴고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밑줄 긋는 익숙한 풍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속칭 수능 ‘1타 강사’처럼 말이 재미있고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게 하는 역량이 교사들에게 요구되었다.
반면, 경험 중심 교육과정은 아동의 흥미를 고려하여, 교육과정을 생활 경험을 중심으로 구성한다. 역사 영역을 학습할 때는 단편적인 지식 암기를 벗어나 실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위주로 수업 재구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단순히 교실에서 사회 교과서를 펴는 것을 떠나, 정말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학생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학생들은 역사를 머나먼 과거의 한 조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저 고풍스러운 건물은 무엇인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볼 것이다.
두 교육과정의 유형 중 어느 것이 옳은지의 문제는 성립할 수 없다. 생각이 다를 뿐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단점이 있다. 교과 중심 교육과정은 학생의 흥미를 무시했기 때문에 수업이 지루하고 재미없어질 수 있다. 어릴 때 무조건 외워대는 수업 도중, 졸다가 플라스틱 흰색 파이프로 머리를 맞은 기억이 난다. 얼마나 재미없었으면 무시무시한 매 앞에서 꾸벅꾸벅 졸 수 있었을까. (물론 아팠지만, 그 선생님을 원망하진 않는다.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머릿속에 하나라도 더 넣으려는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 자체에 흥미가 없었을 뿐이지, 잠을 쫓으며 열심히 듣는 학생들도 많았다.) 경험 중심 교육과정도 마찬가지다. 학생의 흥미를 지나치게 고려하다 보니 기초학력이 저하되었고, 교육의 주도권을 일정 부분 학생에게 넘기다 보니 교육의 방향감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문제해결 중심으로 수업을 재구성해야 하는데, 역량이 부족한 교사가 자칫 허술하게 교육과정을 재구성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이 안 게 된다. 결국 1957년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쏘아 올려지면서, 미국은 경험 중심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브루너(J. S. Bruner)의 제안에 따라 학문 중심 교육과정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우리 반의 현장체험학습은 어땠을까? 송산사지에 오자마자 아이들은 눈 내리는 날 남부지방의 아이들처럼 웃으며 넓은 공간을 활보했다. 담임보다 상대적으로 편하고 친근한 협력 선생님에게 들러붙어 아이들은 셀카를 찍었다. ‘수업 중 진지함’을 강조했던 나한테도 제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함께 셀카를 찍자고 한다. 평소와 달리 아이들 눈높이와 요구에 맞춰주기로 했다. 함께 웃으며 아이들이 원하는 콘셉트로 다양한 자세를 취했다. 4학년 아이들이 듣기에는 많이 이른 감이 있지만, 조선의 건국 이야기를 들려주며 송산사지와 관련된 인물을 설명해 주었다.
낯설고 어렵지만, 귀를 쫑긋 기울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어떤 존재와도 대체할 수 없이 빛났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왁자지껄하고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모두 눈을 감았다. 아무 소리 내지 않고 마지막까지 고려에 충절을 지킨 신하들의 숭고한 마음과 축적된 고려 말의 부조리를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역사의 서막 사이에서 고민하라는 뜻이었다. 새소리, 곤충 소리를 비집고 들어온 따사로운 햇볕의 온기가 모두의 마음에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 위화도 회군, 고려 말의 충신 등 나름대로 열심히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송산사지를 벗어나 바로 옆 미술도서관으로 이동하여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 관련 자료를 각자 자율적으로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직 자료 탐색이 익숙지 못한 아이들이라 자료를 찾는 방법과 요령을 알려주었다. 지식을 단시간에 전달하는 측면에서 효율적이지 않지만, 그것에 생생함이란 옷을 입혀주고 사제 간에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준 현장체험학습은 가끔은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학적 이론은 차치하고 단순히 직관에 기대어서 하는 말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즐거운 하루를 선물해준 현장체험학습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 듯하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전국 유‧초등교원 12,15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97.3%가 불의의 사고로 인한 학부모의 민원 및 고소‧고발을 걱정했다. 현장체험학습 관련 민원 및 고소‧고발을 본인이 겪거나 동료 교원이 겪는 걸 보았다는 응답이 30.6%에 달한다. 민원, 고소‧고발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교사가 최선을 다해 학생을 지도했음에도 발생하는 불가항력적 안전사고 조차 걱정해야 하는 교직의 현실이 서글프다.
(1)『쉽게 풀어 쓴 교육학』(이병승 외 2인)과 『교육학 끝판왕』(조우태 외 2인)의 교육과정 관련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