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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Aug 10. 2024

정의 구현(2)

2편

* * *


     “김윤성! 많이 기다렸냐? 밥 먹으러 가게 어서 운전대 잡아.”

    신재율, 그놈의 목소리가 머플러에서 흘러나오는 굉음과 함께 들렸다. 놈은 재빨리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옮겨탔다.

    어렸을 적 갖고 놀던 줄팽이 무늬와 흡사한 BMW 로고를 슬쩍 보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가 새로 뽑은 모델은 훌륭했다. 독일의 감성과 기술은 두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디자인까지 여타의 모델과 비교하여 압권이었다.

    “오랜만에 소곱창이 끌리네.” 만나기로 한 시간에 그놈은 언제 늦었다. 뻔뻔함을 머금고 배회하는 목소리가 익숙해졌기에 망정이지, 예전 같았으면 신물이 올라왔을 것이다. 우리는 유명한 맛집을 찾아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기름에 지글거리는 곱창에 속이 니글거렸다. 흡사 오염된 하천 바닥에 박힌 돌에 붙어, 흐르는 물에 힘없이 느물거리는 실지렁이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친구, 이번에는 경주로 가는 게 어때? 네 고향이잖아. 특별히 배려하는 거야.”

    곱창 속의 곱이 역겹게 흘러나왔다. 그놈이 내 고향을 정확히 짚어 여행지로 언급하자, 그의 정신머리를 고쳐줄 때가 가까워졌다는 걸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좋아. 그럼 비서한테 일정 짜보라고 할게. 이번 여행도 기대되는데?”

    그놈과 나는 준엄한 계약을 맺었다. 첫째, 신재율은 김윤성에게 자신의 자동차를 운전할 권리를 부여한다. 둘째, 김윤성은 신재율의 평생 친구가 된다. 셋째, 자동차에 대한 유류비, 수리비, 과태료, 보험료 등 금전적인 지원은 신재율이 짊어진다. 넷째, 김윤성은 신재율이 제안하는 여행을 분기별로 1회 함께 해야 하며, 여행 중에 신재율이 제안하는 다양한 오락에 김윤성은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다섯째, 본 계약을 먼저 어기는 자는 똥침을 백 번 맞아야 한다.

    무시무시한 계약이었다.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부여잡고 한 여자가 떠나갔을 때, 그놈과 나의 계약은 피의 서약과 같이 엄숙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이 모든 상황이 만들어지는 데는 그놈의 장난스럽고 괴짜 같은 성격이 한몫했다.

    얼마 후 이메일을 받았다. 2박 3일간의 경주 여행 일정이 정리되어 있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회사에 소속된 비서의 노동력을 남용한 신재율의 악질 행위가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계약에 따라 그놈의 친구라는 정체성은 붙들어 맸다.

    “윤성! 이메일 읽어봤지? 이번에는 뭘 해볼까. 흐흐.”

    “시끄러워, 숙소는 내가 정한다. 그리고 네 비서는 불편하니까 따라오지 않도록 해줘.”


* * *

    나는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이 서린 고도(古都)를 뒤로 하고 상경할 때 울음을 참지 못했다. 서울 소재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한 탓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던히 서울의 분위기에 묻어갔다. 삼 년 동안 착실히 공부한 덕에 대입 수능시험은 두렵지 않았다.

    대입 시험 날이었다. 1교시 국어 영역을 풀고 만점이란 확신에 젖었다. 쉬는 시간, 홀가분한 마음으로 소변을 볼 때, 느닷없이 담배 연기가 콧속을 찔러왔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장실 칸을 충동적으로 힘껏 찼다. 잠금장치는 날아갔고, 쪼그린 채 담배를 뿜어대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죽을래?”

    “여기 금연구역인 거 몰라?”

    나는 기죽지 않고 응수했다. 그놈은 태우던 담배를 벽에 짓이겨 누르고 바닥에 침을 ‘찍’ 하고 불량스럽게 갈겼다.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약간의 움직임도 싸움의 촉매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른손이 긴장감을 딛고 치켜 오르려 마음을 잡았을 때, 2교시 시작 종소리가 끼어들어 긴장감에 물을 끼얹었다.

    “운 좋은 줄 알아. 너 내가 반드시 찾아낸다. 물론 내가 가려는 대학 문턱도 못 밟겠지만. 흐흐.”

    그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큰 위안이 되었다. 저런 소갈머리 없는 녀석이 갈 수 있는 대학이라면 분명 질이 떨어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한 줌의 먼지처럼 그놈의 말을 손으로 휘저으며 갈 길을 가려는데 뒤가 어쩐지 싸한 느낌을 받았다. 즉시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그놈은 양손의 두 번째 손가락을 앞으로 모으고, 나머지 손가락은 깍지를 낀 상태로 내 항문을 노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뒤로 돌아보자 그 녀석도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아, 정말 아쉬워. 한 방 찌를 수 있었는데. 흐흐.”

    수학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풀 수 있는 문제를 다 풀었더니, 어려운 네 문제가 남았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만 갔다. 마음은 3번으로 찍고 싶었으나, 오른손은 따라주질 않았다. 오른손은 자신의 정중앙에 깊숙이 파묻혀 있는 눈으로 정답을 본 것인가. 내키지 않았지만, 손의 의지를 따라 4번으로 답안을 작성했다. 오른손의 의지에 따른 덕분에, 명문대학 국문과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얻게 되었다.

    입학 후 첫 수업 시작 전이었다. 이미 동기들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친해져 옹기종기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시장을 방불케 하는 술렁임에 귀가 아팠다.

    소음 속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정유회사 재벌 2세가 우리 학과에 입학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때 강의실 앞문으로 고사장의 소갈머리가 대머리 비서 둘을 양쪽에 끼고 들어왔다. ‘악연’이란 주제로 재미 삼아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는 신(神)의 놀음에 말려든 것만 같았다.

    “어, 너는?”

    “뭐야 너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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