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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완결)

완결

by 나세진

* * *



“철민아, 요즘 소송 많이 들어왔다며? 좀 바쁘겠지만 내일 시간 좀 내줄 수 있냐?”

“바쁘긴 해, 그런데 왜?”

“그때의… 녹음테이프 갖고 좀 만나야겠어.”

“그때라면?”

“무리한 일인 거 알지만 부탁할게.”

“….”

“미안하다. 장소는 우리 학교. 교장실 뒤편 밑동만 남은 느티나무에서 보면 안 될까?”

“난 괜찮아. 근데 너… 괜찮겠냐? 굳이 그때 일을 끄집어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해결해야 할 일이야. 이젠 마무리하고 싶기도 해.”


한의사 영감은 내 모교 앞 정문에서 노상을 깐 것처럼 자리를 펼쳤다. 마을의 용한 의원으로 만들어준 보답으로서 고성군민들에게 무료 진맥을 해준다는 명분. 그것으로 김미현을 끌어들였다. 맹독 같은 명분을 생각 없이 덥석 물어버린 김미현의 진맥과 상담, 그리고 이어지는 한의원의 진료, 무의식을 끌어내는 수면, 김미현의 뇌를 짓누른 몽마, 두려움이란 본연의 감정을 툭툭 건드린 몽마 속에서 그녀는 모든 사실을 잠꼬대하듯 내뱉었다. 순간을 놓칠세라 모든 걸 녹음기에 담았다.

무엇보다 고마움을 느낀 건 이현진이었다. 서울의 무역회사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 속, 모든 미팅을 취소하고 우리가 지금껏 함께한 순간들을 이어나가기 위해 고성으로 차를 몰고 와주었다.

곪디 곪은 상처가 종양이 되어 터지듯, 과거의 기억과 나의 딜레마는 꿈으로 터져 나왔다. 주르르 흐르는 고름을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 흘러내려 반창고로 임시 막음 할 수밖에 없었다. 뿌리까지 깨끗하게 짜내어야 새로운 살이 매끄럽게 재생하는 것처럼, 나에겐 기억과 신념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했다.

오후 다섯 시, 우리는 정문에서 만나 함께 들어갔다. 수위 아저씨가 출입을 통제했다. 맥가이버 아저씨는 결국 쫓겨났다는 걸 한 번 더 실감했다.

허망하게 허리가 잘려 밑동만 덩그러니 남은 나무는 안타깝게도 더는 교장실 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허리가 완전히 잘리는 순간까지 나무는 어떤 생의 순간들을 떠올렸을까. 가장 중요한 걸, 자신과 영혼을 공유하는 모든 존재에게 알리려고 시도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 나무가 나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말이다. 우리는 나무를 영접하러 온 셈이었다. 나이테를 살펴보니 가장자리의 나이테는 그전에 만들어진 나이테와 눈에 띄게 떨어져 있었다. 한 선생님과 함께했던 순간만큼 나무도 젊어졌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고적한 뒤뜰 속에서, 아날로그식 녹음기를 꺼냈다. 일부러 발품을 팔지 않고서야 구경도 못 할, 작고 아담한 테이프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구식 녹음기였다. 툭 튀어나온 스프로킷이 테이프 감개를 회전하자, 연착되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기차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의 나무들도 숨을 참고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까. 지독히도 고요한 시간 속에서 테이프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모든 건 우리가 꾸몄어. 인정할게. 어쨌거나 한 선생님이 이상한 새교육운동을 하려고 시도해서 그런 거 아냐? 관심 종자들이나 하는 짓을 해서 질서를 어지럽히니 다 싫어할 수밖에. 솔직히 요즘 애들 얼마나 약았어? 뭐? 자율권? 현실도 모르는 이상주의자가 왜 하필 우리 학교의 잘 돌아가던 시스템을 흐트러트려? 그리고 민주적 학교 운영을 외쳤지만, 정작 민주적이지 못한 일방적인 운영에 이런 사달이 난 거라고.”

“당신 말로는 아직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아. 선생님의 개혁을 지지했던 선생님도 많았다고. 안 그래?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선생님들이 말없이 자진해서 학교를 그만두는 게 말이 돼?”

“아, 알았으니, 진정해. 이사장님의 친구분이 한 선생님을 자르라고 외압을 넣었다고 하더라. 그 친구분은 우리 학교 졸업생을 둔 학부모이기도 하고. 이름이 뭐더라. 김... 동후? 우리 고성에서 서울대생 나왔다고 난리 났던 그해에 서울대 간 애라던데. (...) 하지만 모든 증거는 시간이 지난 지금 다 인멸되어 없을 거고, 하하하하.”


딸-깍, 한철민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현진은 나를 쳐다봤다. 숨죽이며 함께 듣던 나무와 꽃들은 그제야 살랑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뜰이란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들의 시간에 맞춰져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느티나무에 손을 얹었다.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나무라면 선생님의 깊은 가르침을 오히려 더 잘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서 거친 나무껍질을 쓰다듬으며 귀 기울였다.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만 쉭쉭 들리는가 싶더니, 바람 소리가 아쉬운 적막함만 건네주고 사라졌다.

“이번 주랬지? 김동후 결혼식에 아무래도 가야 할 것 같아. 너희들은 어떻게 할래?”


그, 아니, 그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전에 한의원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확인해 볼 것도 있었다. 모든 걸 떨치고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정체 모를 늙은 한의사 선생을 만난 건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지의 한 점에 신경을 집중하여 늙은 한의사는 환자의 팔에 침을 놓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나무패를 받고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의사는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환자에게 눈을 돌렸다. 기다리면서 마당을 거닐다가 느티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멈춘 발걸음은 떼어지지 않았다. 균일하게 뻗어나간 느티나무 가지 아래의 영역은 한의원 안에서도 또 다른 결계가 쳐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뒤뜰에서처럼 나무와 대화를 시도해보았으나 허사였다. 예전에 오컬트 영화를 보며 나무와 대화하는 영화 속 사람들의 모습에 코웃음 쳤던 게 떠올랐다. 그때 쳤던 코웃음을 되돌려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친 짓이라 생각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부끄러움과 약간의 패배감이 섞여 고개를 숙였다. 나무 아래 자연스럽게 떨어져 쌓인 잔가지는 어떤 연유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어도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대벌레 같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나뭇가지는 여전히 진한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붙잡고 있을수록 안정감을 주는 나뭇가지였다. 김동후의 마지막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을 정리하려 할 때, 나뭇가지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진동했다. 그 마지막 안간힘으로 가지의 색은 조금 전과 달리 바란 빛을 띠었다. 문득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기억의 파편 중 하나일까.

“젊은이, 좀 나아졌나.”

한의사는 어느덧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몽마와 싸우는 중이죠.”

“허허, 혈액이 안정됐어. 어떤 일로 좋아졌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 일을 50년 가까이 해와서 바로 알아볼 수 있지.”

“수척해 보이진 않아요?”

“예전엔 그랬지. 진맥할 거니 이리 오게.”

한의사는 맥을 짚었다. 내 손은 덤덤하게 이끌려갔다. 아예 모든 걸 한의사 선생에게 맡겼다. 그는 신중하게 맥을 느끼려는지, 허공으로 시선을 올렸다가 미동도 안 하고 멈추었다. 처마 밑 풍경도 조심스레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이내 그는 선뜻 팔목에 침을 서너 군데 찔렀다. 밝은 곳으로 나왔다가 인기척을 느껴 어두운 틈새로 재빨리 들어가는 바퀴벌레 잡듯이 침은 속도에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아야! 너무 대충 찌르시는 거 아녜요?”

“시끄러워,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배 위에 뜸도 하나 뜰 거야. 나쁜 기운을 좀 몰아내야 하지 않겠나.”

쑥 타는 냄새에 취해 금방 잠이 들었다. 서서히 몸을 나른하게 하여 밀려오는 잠이 아니라 순식간에 잠입하여 뇌리를 치는 잠이었다. 혈관에서 가시들이 쭈뼛쭈뼛 돋아나 촉수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전신이 고통으로 뒤덮여 부르르 떨렸다. 고통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언젠가 내 목덜미를 덥석 물며 린치를 가할지 모를 김동후를 떠올렸다.

암흑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실에 김동후의 얼굴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를 검은색으로 덧칠한 느낌이었다. 꿈속인 듯 꿈이 아닌 위화감이 느껴졌고, 어느덧 검정에 취해 나의 온몸도 검은색이 된 마냥 보이지 않았다. 김동후의 얼굴과 대면했다. 김동후의 시선에서도 내가 목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보일까.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지만, 얼굴은 죽은 자와 같이 창백했다. 눈의 표면은 아슴푸레 빛날 뿐, 검은 벽의 박제된 동물처럼 미동도 없었다. 섬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체의 모든 모낭에서 촉수가 솟아올라 살결이 떨렸다.

박제된 그의 눈은 부담스러웠다. 정수리부터 타고 흘러내리는 고착제가 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이젠 죽었구나, 나는 어쩔 수 없구나, 꿈은 생생할수록 더욱 고통스럽구나, 하며 눈을 감으려 했다. 눈을 감아도 안구를 덮은 눈꺼풀은 투과성 재질로 이뤄진 듯 김동후의 박제된 얼굴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일체유심조, 일체유심조, 일체유심조!

바깥에서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몸에 열기가 일었다. 내가 마음의 주인인데, 꿈도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마음은 내 의지를 허락하지 않는 걸까. 잠깐이었다. 모든 것이 흑색으로 칠해진 칠흑 같은 공간 속에 메마른 느티나무 가지가 보였다. 늪에 잠겨 허우적대는 어린 양처럼, 선택의 여지 없이 그걸 잡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꽉 말아쥔 주먹 때문에 손바닥 아랫부분에 손톱자국이 찍혔다. 마른 느티나무 가지 속에 있던 사념들이 내 몸으로 엉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몸에 힘이 쫙 풀리며 눈앞에 굳건히 박제된 김동후의 얼굴은 눈 녹듯 녹아 흘려내려 갔다. 전신의 감각이 되돌아왔다. 평온했다.

“혼곤히 잠들었네요. 일어나세요.”

부스스 열리는 눈에 간호사의 모습이 비쳤다. 간호사는 엷은 미소를 띠고 나도 모르게 미간에 진 주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아, 얼마나 잤죠?”

“한 시간 정도요.”

“이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실례했네요.”

간호사의 말에 멋쩍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소를 지을 때, 한의사가 호기롭게 다가오며 말을 받았다.

“굉장한 사투를 벌였나 보군. 그렇게 인상 쓰며 자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네.”

“네, 굉장했죠. 선생님 덕분에 큰 짐을 덜어버린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정체가 뭐죠?” 늙은 한의사는 웃음으로 받아넘기려다 마지못해 한 마디 던졌다.

“뭐긴 뭐야, 사람 살리는 의사지. 내가 뭐 사이비인 거 같아? 싸가지없는 놈.”

“아, 그건 아닙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려.”

진료비를 계산하고선 손에 쥔 고졸한 나뭇가지를 원래 있던 느티나무 아래 조심스럽게 두었다. 나뭇가지를 건드려 동티가 난 줄 알았다.

나뭇가지를 통해 몽마와 대면할 수 있었다. 몽마는 내게 말했다. 너는 절대 날 거부할 수 없다고, 꿈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관이라고. 나는 몽마에게 그간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하며 그를 떠나보내려 했다. 몽마는 내게 더욱 화를 내라고, 신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의 호흡을 쥐어 짜내서라도 분노하라고 주문했다. 몽마에게 답했다.

‘이만하면 된 거 아냐?’

주저하지 않고 몽마를 향해 나뭇가지를 던졌다. 몽마는 나뭇가지를 보더니 칭얼대는 아이가 혼이나 단념하듯이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잠적했다. 느티나무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애초에 말을 하지 못하는 나무가 말을 한다고 믿는 나는 또 어떤 존재인가. 본체에서 떨어진 나뭇가지, 그것은 그 나무의 기억이자 괴로운 의식이 아니었을까. 나뭇가지는 내게 말했다. 아니 말하는 것 같았다.

몽마가 나타나는 근원은 선생님의 계명을 수호하려는 마음에 과부하 걸린 탓이라고. 너는 선생님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노력했다고, 한의사 선생은 이미 알고 있던 것 같다. 몽마는 내가 만든 존재이자 또 다른 나란 걸.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당당함과 소신을 지키는 것으로 몽마를 물리칠 수 있다는 걸.

"저기, 선생님. 저 괴롭혔던 그 친구 결혼식에 가려고요.“

그는 씩 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고선 내쫓듯이 손을 허공에 휘적거렸다. 김동후는 선하게 변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그를 처리해야 할까. 몽마는 김미현을 옭아매서 힘겨운 꿈속을 체험하게 했다. 덕분에 모든 걸 실토하게 했다. 어렵게 알게 된 진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큰 과제를 떠안고 나는 시장 기름집의 향긋한 내음을 맡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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