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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쌍미음 Feb 10. 2021

"저, 우울증인 것 같아서 왔어요."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 처음으로 내원하다.

"그러지 말고 병원에 한번 가봐-"

정신과에 내원해보기를 내게 권유한 건 남편이었다.


옛날 옛적 드라마에서나 나왔을법한

"당신 미쳤어!!!?? 지금 제정신이야??? 정신병원에나 가봐!!!" 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하, 다행히도.


"요즘엔 정말 별거 아니래. 학생들도 많이 간대. 약 먹으면 좋아지는 건데 괜히 힘들어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아이들과 다년간 쌓아온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에 균열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다정한 말투였다.




자, 여기에서,

'고혈압이면 병원에 가서 약 처방받아서 꾸준히 먹어야지' 혹은 '당뇨면 약과 식이요법으로 꾸준히 관리해야지'- 와 같은 맥락으로 '우울증이면 병원에 가서 상담받고 약 먹으면서 치료받으며 그만이지' -라고 남 이야기라면 쉽게 생각하거나 쉽게 이야기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도 이전까지는 그랬다.


감기면 약 먹고 증상을 완화시키면 되지 그걸 왜 약도 안 먹고 고통과 불편함을 고스란히 다 겪고 있어? 분노조절장애면 병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야지, 우울장애면 병원에서 약 처방받고 상담받으면서 치료받으면 되지, 그게 무슨 큰 문제야?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막상 내 일이 되고 보니 달랐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병원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서기가, 마지막 그 한 발을 내딛기가 너무 어려웠다.

참담했다. 내 이성과 감정 하나 제대로 조절 못 해서 병원에 가야 하다니 좌절스럽기까지 했다.


우울증이라는 건 분명히 알겠는데, 이로 인해 일상생활과 아이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겠는데, 그런데 굳-이? 내가 굳이 치료를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욕마저 사라진-아주 극심하게 우울한 상태-였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한 달 가까이를 고민하다가 약이나 받아오자는 생각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 내원하기로 결심했다.


내 상태는 나 자신도 이미 잘 알고 있으니 그 어떤 상담도 원하지 않았다.

우울장애라는 판정을 위한 그 어떤 검사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약만 받아오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도 없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일단 약이나 받아서 먹어봐야겠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라는 의무감만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정신과)에 방문한 날,

'우울증이니 어서 약만 처방해주오-'라는 일방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와 공허한 표정과 눈빛의 내담자였던 나는 원장님의 노련한 주도 하에 이루어진 꽤나 긴 상담 후에야 드.디.어.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효율적인 치료와 약 조절을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진단명 판정과 자세한 소견서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밀검사를 받아야 했다.

정밀검사 예약 날짜를 잡고, 숙제(자가 검사지) 여러 종류를 받아 들고, 드디어 약을 받고 집에 올 수 있었다.


처음으로 처방받은 약은 초등학생 저학년들도 먹을 수 있는 아주 순하고 부작용도 없는 약이라고 하셨다.

아직 정확한 진단명이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가장 약한 약으로 처방했다고 하셨다.




정밀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까지 약 1주일 동안 매일 시간을 지켜서 하루에 한 번씩 약을 복용했다.

내가 원했던 드라마틱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약을 먹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든지, 아이들이 하루 종일 "엄마엄마" 부르는 소리에 짜증이 나지 않게 된다든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든지, 전무하던 의욕이 생기게 된다든지, 식욕이 돋는다든지 -하는 등의 변화는 없었다.


우울증 때문에 매일 우울증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니, - 라는 생각에 오히려 내 상태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치료를 받기 위해 한 발 내디뎠다는 느낌도 그다지 없었다.

정밀검사를 위해 받아온 500문항에 가까운 객관식 문제 풀기와 서술형 문제 풀기가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아. 그냥 다 이 우울한 구렁텅이로 끌어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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