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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Sep 30. 2019

여행은
가는 설렘 반, 돌아오는 아쉬움 반

19년 07월 04일



구불구불한 길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몰려온다. 부까라망가에서 산힐로 가는 이 버스는 마치 칵테일을 만드는 셰이커 같다. 거대한 바텐더인 안데스는 조그만 철제 박스를 능숙하게 흔들어 뒤집고 섞는다. 멀미는 진작 시작했다. 게다가 버스기사님은 목숨이 서너 개는 더 있나 보다. 이 커브길에도 틈틈이 액셀을 밟는 덕에 더 빠르게 그리고 더 격렬하게 버스가 춤추고 있다. 왜 난 이런 "간이 지옥"같은 버스에 있는 걸까? 1분에 10개씩은 있는 것 같은 커브길 그리고 버스 양옆으로는 절벽과 낭떠러지도 보인다. 내 마음의 심연 밑바닥에 늘러 붙은 자아가 이렇게 속삭인다. "이럴 바에 죽는 게 낫겠다. 이만하면 오래 살았잖아. 버스 기사님이 잠시 넋을 놓아서 저 절벽으로 떨어지길. 잠시 엄청 아프겠지만 이 지옥은 벗어날 테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커브길에서 영겁의 "간이 지옥"을 맛보고 있었지만, 버스 밖 풍경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차분했다. 꼬맹이 나무들만 종종 자라 있는 거대한 민둥산. 길가에는 족히 사람보다 두어 배 커 보이는 선인장들이 지나가는 버스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협곡 아래는 하늘색 계곡물이 하얀 거품을 내며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고 하늘에는 거대한 새와 새보다 거대한 패러글라이딩이 하얀 하늘 속 검은 구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들리진 않지만 저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욕지거리가 떠다닐까. 패러글라이딩이 무서워서든 혹은 풍경이 황홀해서든 하여간 시끄러울 거다. 이런 장관이 내 시신경 너머에 닿고 있지만 내 입술은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되내어 말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내가 오늘 멀 먹었는지 버스 사람들에게 더러운 방법으로 알려주기 전에 서둘러서 말이다.


산힐 센트로. 조용한 시골마을 같지만 밤에는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 찬다.




산힐까지의 버스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 거리로는 60킬로밖에 안된다면서 2시간 반이 걸린다던가. 그리고 가는 길의 태반이 절벽과 낭떠러지 그 사이 생사의 갈림길 사이를 달린다던가. 아니면 1분에 커브가 10개씩 있어서 버스를 거대한 셰이커로 만들어버린다던가 말이다. 덕분에 맨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삶은 고난의 연속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삶은 놀랍게도 아름다운 절벽과 낭떠러지 사이 욕지거리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죽을 둥 말똥 고생하며 도착한 산힐은 천국 같았다. 일단 그 버스에서 탈출한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여행의 설렘이 온몸 구석구석을 행복으로 들썩이게 만들었다.


산힐에 있는 공원. 무너진 조형물 사이로 식물들은 파릇파릇 자라 있다. 인류멸망을 맛보는 느낌이다.




그렇게 설렘에 들떠서 눈 몇 번 깜빡이니 산힐을 떠나야 하는 아침도 찾아왔다. 다들 힘들어 죽겠다는 인생도 총알같이 지나가는데 놀고먹고 돈쓰기만 하는 휴가는 얼마나 빠를까. 8시에 맞춘 알람이 머쓱하게도 7시부터 눈이 떠졌다. 게스트 하우스 안, 여행 온 사람들의 사부작 거리는 소리와 바깥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 벌써 대낮이라는 냥 쏘아대는 햇볕은 이불 위로 올라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정말 피곤한다. 온몸은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파서 혹시 누가 곤한 밤에 두들겨 팬 게 분명하다는 확신도 들었다. 일어나기 싫어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아침이 싫어서 이불속에서 잠과 깸 사이 어딘가를 유영하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추어 안간힘을 다해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산힐. 삼일은 꽤 길었나 보다. 꽤나 많이 돌아다녔나 보다. 많이 좋아했나 보다. 보는 길 걷는 길 하나하나 이제 눈에 있는다. 여기 유명한 식당은 다 가봤다. 누가 오면 어디 데려갈지 걱정은 덜었다. 떠나기 전에 꼭 가봐야지 하던 공원 잘 보이는 2층 식당에 마지막으로 갔다. 창가에 앉아서 떠나기 전 소중한 시간을 멍 때리며 보낸다. 아쉬움이란 게 스멀스멀 올라와서 이젠 떠날 시간이라고 나를 약 올린다. 산힐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다시 "간이 지옥"을 맛봐야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이 시간 자체가 놓치기 아까울 만큼 달콤한지. 무의식적으로 커피를 연거푸 들이켜니 진짜로 갈 때가 되었다. 짐 찾으러 가는 숙소 가는 길.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 애썼다. 보잘것없지만 그래서 좋은 분수와 그 옆에 세계수 같은 거대한 나무 하나. 오랜 길 하나. 커피 가게 하나. 성당 안을 밝히는 창문 하나. 길 오르며 투덜투덜 불만이 나온다. 산힐은 오르막길이 많아서 싫다는 불평하는 건 아버지께 배운 경상도 사나이의 사랑 표현일 것이다.


2층 식당에서 먹은 마라큐쟈 주스. 거품이 반이었다.




떠나는 버스. 가는 시간은 또 어찌나 긴지 한숨 푹 자고 멀미로 고생 제대로 하고 나서도 도착하지 못했다. 이럴 때는 눈 꼭 감고 자는 것도 깬 것도 아닌 멍 때리기로 시간을 먹어치워 본다. 또 땅에 발이 닿음에 감사하게 된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나의 집으로 가는 길. 부까라망가에서 겨우 두어 달 묵었지만 벌써 집 온 듯 마음이 편하다. 부까라망가에서 제일 번잡한 27번 도로와 군데 심겨있는 야자나무. 과도하게 많은 노란색 택시나 길거리에 노숙하는 베네수엘라 사람까지. 집에 왔다는 기분이 드는 게 어색하다. 하긴 한국에서 나는 이제 전화번호도 없는 사람이 되었지.




여행이란 집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깨닫기 위해 한다는 말이 있다. 여행을 가기 전, 여행을 하면서 제각각 다채로운 꿈속에서 헤매지만 집에 돌아오면 자각몽에서 깨어난다. 끝은 역시나 아쉬웠고 또 집은 역시나 좋구나. 삶은 여행이라지만 또 여행만으로 평생 살 수 없는 건 집의 안락함 때문일 거다. 마음 편히 쉴 수 있고 화장실에 누가 있는지 걱정 안 해도 된다. 잠을 방해하는 샤부작 거리나 코 고는 소리도 없다. 짐을 풀고 여행 내 내 하지 못했던 따신 물 샤워도 피부가 쪼글쪼글해지도록 했다. 어느덧 해 진지는 오래. 모든 걸 마치고 누운 이 밤은 왠지 그냥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온 듯이 너무 익숙한 밤이다. 그래도 여행에서의 여운은 아직 뻐근한 몸이 알려주고 있다.


돌아온 날 부까라망가에서의 저녁. 여행 다녀온 건 다 거짓말 같고 저녁밥 맛도 거짓말처럼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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