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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Feb 19. 2020

그래도 오길 잘했어.
산타 마르따.

20년 01월 10일





밤새워 달리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구부러진 길을 따라

원하던 그리던 곳에 왔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게 여기 있다고

이리저리 헤매기만 한 걸까


'사람 또 사람'의 노래, '꽃청춘'



  긴 여행의 시작.

  그 첫 단추부터 단단히 잘못 채웠다. 꾸물꾸물 거리다 집에서 늦게 나온 탓에, 그리고 집 앞 슈퍼에서 나초를 먹을까 감자칩을 먹을까 너무 오래 고민한 탓에, 그 날따라 택시도 안 잡히고 우버도 안 잡힌 탓에, 45000원가량 하는 버스 티켓을 허공에 쏘아 터트려 버렸다. 여행 갈 마음에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왔건만 기분을 다 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일지감치 버스에 오르니 한 할아버지가 버스 앞 좌석에 서서 큰 소리로 시끄럽게 일장 연설을 하고 계셨다. 처음에는 내가 모르는 콜롬비아 문화인 줄 알았다. 꼭 할아버지의 모양새가 국회의원 출마의 변을 선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격한 어조로 "콜롬비아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 젊은이들이 기술을 배워야 한다. 의사로서 조언을 하는데 첫째가 허리 건강이다."같은 이야기를 이리저리 하시더니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익숙한 호랑이 연고를 꺼내셨다. 그리고 익숙하게 호랑이 연고의 효능을 줄줄 읊으셨다.



  출발 후 1시간 내내 들은 시끄러운 '출마의 변' 때문에 짜증이 나서 나는 그 할아버지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승객들은 그 연고의 효능에 감동을 했는지 사방에서 연고를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 후로도 버스에는 간식 파는 잡상인, 콜롬비아 전통 모자를 파는 잡상인, 기능성 마그네슘 팔찌를 파는 잡상인이 들락날락했다. 덕분에 버스에 앉아서 원치 않는 홈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버스는 12시간이 넘게 걸렸다. 창밖의 풍경은 매시간마다 달라졌다. 울창한 숲이다가. 도시이다가. 소와 말들이 풀을 뜯는 들판이다가. 그러다가 어두워져 창 밖은 소금이 뿌려진 김처럼 시꺼먼 하늘에 별들이 소금처럼 반짝였다.


  이 정도 시간이면 미국도 갈 텐데 시간 좀 더 보태면 한국도 갈 텐데. 그 시간 동안 나는 고작 북쪽으로 400킬로미터 너머 왔을 뿐이었다. 도착했더니 새벽 3시. 휑하다. 그 시간에 나를 반기는 거라곤 바가지 택시와 내가 영역 침범을 했다고 언짢아하며 으르렁거리는 도시 들개들 뿐이었다.




산타 마르타에 도착. 이 도시를 세운 Rodrigo de Bastidas의 동상과 Tayrona타이로나 공원.


  이렇게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산타 마르타'. 산타 마르타는 콜롬비아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이자 남아메리카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유럽 식민지 도시이다. 산타 마르타의 위치는 콜롬비아의 북부, 그 유명한 캐러비안,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해 있고 콜롬비아의 유명한 휴양지인 카르타헤나의 북동쪽에 있다.

  산타마르타는 도시 구심에서 만나는 옛날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도 재미있지만 근처에 뛰어난 자연환경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콜롬비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 중 하나라는 타이로나Tayrona 국립공원. 콜롬비아 스쿠버다이빙의 성지 타강가Taganga. 그리고 페루의 마추픽추보다도 오래된 고대 도시라는 Ciudad perdida시우다드 페르디다까지. 볼거리 즐길거리가 엄청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하루 늦게, 그것도 새벽 3시에 도착해버렸더니 다음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늦잠은 늦잠대로 자서 엄청 늦게 일어났고 몸은 몸대로 천근만근이라 움직일 수 없었다. 휴양지답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그래서 그대로 쏟아져 내려오는 태양광선을 보니 길거리로 나설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저 숙소 해적들이나 쓸법한 해먹에 누워 선선해지길 기다렸다가 느지막이 해가 조금 기운을 잃는 낌새를 보이자 그제야 구도심으로 향했다.


알록달록. 헤매어도, 걷기만 해도, 좋은 길.


  구도심은 헤매기 좋은 곳이었다. 헤매기 좋다는 건 두 가지 뜻이다. 첫 번째는 어딜 향해 걸어도 아름다웠다는 뜻이다. 걷다 보면 나오는 유럽식 옛 건물은 오래된 건물에서만 느껴지는 중후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구도심의 끝자락에는 해변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해변에 앉으면 저 멀리 등대가 보였다. 낮에는 잘 안보였지만 밤에 환히 빛내는 게 꼭 땅에 뜬 별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 뜻은 정말 길이 헷갈리는 곳이었다는 뜻이었다. 그야말로 나는 길을 잃었다. 건물 생김새가 다 거기서 거기. 걸어 다니면서 같던 공원을 또 가고 또 가고. 그러다 길 끝자락 해변에 또 도착하고 또 도착하곤 했다. 이 길 잃기는 꽤나 재밌는 유희였다. 예상되는 재미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길에 가끔씩 만나는 레모네이드와 커피는 꿀처럼 달았다. 




  그다음 날은 타이로나Tayrona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이 국립공원은 콜롬비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공원이자 콜롬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 단추도 어디다 잘못 채워졌다. 빌어먹게도 시작부터 말솜씨가 현란한 사기꾼한테 사기당할 뻔하고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관광지일수록 사기꾼이 많지만 특히나 남미 관광지에서는 일단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가정해 놓고 대화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 대개는 사기꾼이 맞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기꾼들은 호구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그래서 덕분에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그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재능이 있다.


  타이로나에서도 그 재능은 빛을 발했다. 타이로나에 들어서자 자석에 들러붙는 철가루처럼 호객꾼, 사기꾼들이 하나하나 들러붙는다. 내가 '타이로나에서 1박 하려고 한다'라고 하니 어디선가 파일을 가져와서 이것저것 보여준다. 그러고선 동양인은 돈 많으니까 라는 인식 때문인지 비싼 여러 가지 상품들을 결합해서 아주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한다. 그러고선 사기꾼들이 합심해서 아주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분위기로 이끌어간다.


  잠깐 혹했지만 나는 다행히 이런 재능 덕에 사기꾼의 냄새를 맡는 후각도 타고났다. 역시나 구글 검색 조금 해보니 얼탱이가 없는 가격이다. 그 사람들은 다행인 줄 알아야 할 거다. 과외선생님이 내게 스페인어 욕을 결코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주민이 파는 코코넛을 마시면서 숲 속을 헤매다 보면 갑자기 바다가 나타난다.


  타이로나 국립공원 시작 지점에서 Cabo San Juan de guia 해변까지는 걸어서 2시간쯤. 하지만 걷기보다는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고 헤매었기 때문에 3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냥 지나치기엔 이쁜 게 너무 많았다. 들풀들. 들숨날숨 쉬는 파도.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 왜 콜롬비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원인지 한걸음마다 알 수 있었다.


  이 길을 작정하고 끝까지 걸으면 원주민 마을에 도착한다고 한다. 하지만 괜히 남에 집까지 쳐들어가 관광이랍시고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 San Juan de guia 해변까지 걸었다. 내가 많은 해변을 본건 아니지만 경험한 해변 중 가장 신비로웠다. 햇볕을 품은 바다 표면이 금빛으로 흔들렸다. 멀리 검은 바다가 가까이 에메랄드빛으로. 그러다 하얀 거품으로 사라졌다.




  수영을 하고 흠뻑 젖은 생쥐꼴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먼 하늘을 봤다. 2019년 마지막 태양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늘 그렇듯. 붉게 발광하며 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하늘은 너무 맑아서 달에 눈이 부셨다. 별들도 하나하나 자기주장이 강했다. 캠프에 누워 먼 하늘부터 머리 위까지 별 하나씩 헤아리다 보니 불현듯 내일이 왔다. 종소리를 기다리던 새해와 다른. 요란하지 않은 새해였다.


  조용한 새해맞이가 끝나고 산타 마르타로 돌아갈 시간. 보트를 타고 돌아갔다. 보트를 예약하고 이것저것 물으니 보트 이름이 타이타닉이라는 둥 별 농을 다 던진다. 내가 수장될 거라는 농은 별로 반갑지 않았지만 그게 뱃사람들의 자신감으로도 느껴져서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보트는 참 날랬다. 거대한 날치를 타면 이런 느낌일까? 올해의 두 번째 해가지는 걸 보면서. 물따귀를 사정없이 맞으면서. 설마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아닐까? 걱정하면서. 돌아가는 보트 안.  밤새워 달리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구부러진 길을 지나 원하던 이곳에. 그래도 참 잘 왔구나 싶었다.


그래도 오길 잘했어. 산타 마르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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