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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kim Feb 27. 2020

라 과히라:
바다와 태양과 바람과 고요의 땅

20년 01월 17일




  어떤 여행은 놀라운 경험이다. 사진으로도 남길 수 없고 글로도 남길 수 없는.


  빨래는 장기여행과 단기여행을 나누는 기준. 집에서 빨래하려고 꽁꽁 싸매는가? 아니면 날 잡고 숙소 화장실 구석에서 샴푸로 빨래를 하고 있는가?




  타이로나 국립공원에서 제대로 더-럽게 놀았다. 대자연에서 샴푸도 비누도 갈아입을 옷도 없이 1박 2일을 보냈다. 그 뒤 후유증은 진절머리 나도록 찐-했다. 나는 1박 2일 만에 돈 많아 보이는 동양 여행자에서 냄새나는 불쾌한 동양인으로 바뀌었고. 모든 호객꾼과 사기꾼을 불러 모으던 마법의 호갱은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불법 입국자로 바뀌었다.


  그렇게 바다 냄새를 풀풀 풍기며 힘겹게 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내내 호스텔 구석 빨래장에서 바닷물에 찌든 옷을 빨아야 했다. 장기 여행의 시작이었다.




라 과히라 가는 길. 쭉 뻗은 광야에 길과 가로수뿐이다.


  아름다웠던, 고생했던 '산타 마르타Santa marta'를 뒤로 하고 향한 다음 목적지는 '라 과히라La guajira'의 'Cabo de la vela카보 데 라 벨라'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청록색 캐러비안 바다와 사막이 만나는 땅이자 이 지역 인디언 와유Wayuu들의 땅이자 그리고 콜롬비아에서 가장 못 사는 사람들의 땅이었다.


  라 과히라는 콜롬비아에서 가장 최북단. 그중 카보 데 라 벨라는 라 과히라의 거의 최북단으로 남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땅이었다. 다르게 말한다면 오지 중의 오지. 가기 더-럽게 어려운 곳이었다.


  가는 길은 먼저, 산타 마르타에서 라 과히라의 주도인 리오아차Riohacha로. 그다음은 리오아차에서 우리비아Uribia라는 포장도로로 연결된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로 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비아에서 여행사를 통해 카보 데 라 벨라까지 비포장을 뚫고 가야 한다. 설명을 보아 알 수 있듯 더-럽게 가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리고 산타 마르따를 떠날 때까지도 이렇게 복잡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산타 마르타에서 라 과히라의 주도, 리오아차를 도착하면서 나의 멘붕은 시작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면 열렬한 환영 인파나 최신식 터미널이 있다던가 그런 건 기대도 안 했다. 그저 터미널에 도착하면 카보 데 라 벨라로 가는 버스쯤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 최소한 버스가 터미널로는 가줘야 하는 것 아닌가? 버스는 터미널도 가지 않고 어딘가 알지 못할 곳으로 향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기로는 버스기사는 터미널 가는 것도 잊은 채 퇴근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당황스러워 앞으로 나와 기사님께 물어보았고, 나만 당황스럽지 않았는지 콜롬비아 누나 두 분도 함께 나와서 기사님께 물었다. 그렇게 콜롬비아 누나들과 나는 리오아차 어딘가 길 구석으로 추방되듯 내려졌다.




리오아차에서 봤던 지나가던 탱크. 설마 이걸 올렸다고 잡혀가진 않겠지?


  하지만 나는 럭키 가이. 그 누나들이 가려하는 곳도 나와 같은 카보 데 라 벨라였던 것이었다. 바로 우리는 하나의 팀이 되어서 택시를 타고 리오아차를 헤매었다. 어떻게 저기로 갈 수 있는지 나도 콜롬비아 누나들도 택시 기사님도 몰랐기 때문에 물어물어 이 동네 여행사로 향했다.


  여행사에 도착하자마자 큰 절망에 빠졌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 때문에 지금은 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절망했다. 여기서 하루 자고 가야 하나? 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좀 알아보고 올걸... 하지만 역시나 여행사의 말은 순 개뻥이라는 사실은 곧 들통났다. 우리비아로 가면 카보 데 라 벨라로 가는 차가 늦게까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여기 콜롬비아에서 여행사 이름을 달면 사기꾼 아니면 도둑놈이다.




  우리비아에서도 카보 데 라 벨라로 들어가는 것은 지역 여행사를 통해서 가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놈들도 가격으로 장난 짓이다. 다행히 우리비아 오는 길에 합류한 프랑스 형님이 사기꾼을 잘 상대해줬다. 역시 사기꾼한테는 고성과 협박, 얄팍한 꾀와 그러면서도 호탕하게 뒤끝이 없어야 한다는 걸 프랑스 형님을 통해서 배웠다.


  마지막으로 카보 데 라 벨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들어가서 마실 물, 먹을 것을 미리 사가야 하기 때문이다. 카보 데 라 벨라는 들어가는 게 만만치 않기 때문에 안에서는 모든 것이 비싸다. 그래서 물만 20L, 과자, 바나나도 잔뜩 샀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불편한 여행지를 꼽아라구 한다면 단연 나는 여기를 꼽으리라. 얼마나 이쁘고 좋은 곳이길래 이렇게 가는 길이 어려운지. 안 이쁘면 구글 지도 별점 테러할 각오도 진즉 했다. 




  내 숙소는 'Mar y sol'. 한국말로 하면 '바다와 태양'. 꼭 80년대 일본 드라마 제목 같은 이 숙소는 이 동네 와유 원주민이 운영하는 숙소였다. 한 아이가 나를 보더니 입을 막고 놀랜다. 딱 봐도 한류 팬이다. 이런 시골 동네까지 한류는 구석구석 퍼졌다. 아마 이글루에 사는 알래스카 원주민도 아마존에서 수렵채집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BTS의 피땀눈물을 따라부르지 않을까.


보물처럼 가져온 BTS 공책. 그리고 살면서 동양인 처음 봤다며 끊임없이 날 괴롭히던 녀석.


  그 아이는 쉬고 있는 내 곁으로 와서 보물인 양 중국 어느 공장에서 찍어낸 라이선스 없이 불법으로 만들어진 BTS 공책을 보여준다. 거기다 한국어로 그 아이 이름을 노트에 적어줬더니 참 좋아한다. 그리고 주변 꼬맹이들도 자기보다 스페인어를 못하는 신기한 동양인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덕분에 조용히 쉬기는 글렀지만 이게 코이카 단원의 할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처음에 같이 오게 된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투어도 같이 진행했다. 사람들 하나하나 다 좋았다. 맥주를 소환하는 능력을 가진 것인지 그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어디선가 계속 맥주를 구해와 마시던 콜롬비아 누나들도. 우리 팀이라서 천만다행이었던, 진상과 당당함 사이를 줄 타는 프랑스 커플도 너무 좋았다.


  스페인어는 잘 못하는 내가 여기서 살아남은 건 다 동행 덕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이라곤 사진 찍어주기 뿐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면 아주 깜짝 놀랄 거다. 적어도 '사진만큼은 한국인'이란 걸 증명해주었다.




사막과 바다와 하늘이 뒤섞이니 참 묘하다.


  라과히라의 바다는 참 신기하다. 카보 데 라 벨라에서 참 조용하던 바다가 북쪽으로 조금 차 타고 왔을 뿐인데 모자가 날라갈 정도로 바람과 파도가 거칠어졌다. 먼바다에서 온 강한 바람을 타고 파도가 절벽으로 쏟아진다. 그리고 그 파도는 절벽에 부딪쳐서 하늘 높게 솟구친다. 그러면서 우수수 떨어지면서 무지개를 만들어 낸다. 사막의 주황. 바다의 파랑. 그 사이 무지개. 그 광경을 보면서 마시던 검정 탄산 물은 참 달았다.




  3시간여의 짧은 투어의 마지막은 석양이었다. 카보 데 라 벨라 가장 북서쪽 높은 절벽 위에 등대라고도 부르기 힘든 작은 조형물이 있다. 해 질 녘이 되자 여기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월에 세 번째 해던가 네 번째 해던가. 아무튼 별 다르지 않던 해는 바다 너머로 사라져 갔다. 아니 사라져 갔다기보다는 캐러비안 바다를 지나 태평양으로 서서히 넘어갔다.


  그러면서 파랗고 하얗고 붉었던 하늘은 서서히 멍들어갔다. 바다는 조용히 검게 타들어갔다. 울먹이던 하늘과 검은 사람의 그림자. 그걸 모른 채 돌아서 숙소로 다급히 돌아가는 사람들. 나는 맥주를 손에 놓는 법이 없는 콜롬비아 누나들과 함께 그 멍한 하늘을 뻔히 쳐다보았다. 빨리 돌아가자며 재촉하는 가이드의 목소리는 들려도 못 들은 채 했다. 수초마다 달라지는 그 하늘은 참 경이로웠다.


여기 온 사람 중 이걸 본 사람은 반도 안될꺼야.




  다음 날.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있는 카페 겸 생과일주스 집. 인터넷은 커녕 전화도 안 터지는 깡촌이지만 이 곳만큼은 전화가 잘 통한다. 밀린 카톡도 보느라 게임도 하느라 앉아서 토마토 데 아르볼 주스를 마신다.


  하지만 이삼 분에 한 명 꼴로 이 동네 원주민이 내게 와선 불쑥 모칠라를 눈앞으로 들이민다. 가격을 들어보면 참 싸다. 이 동네 원주민들의 소득 대부분은 이 모칠라에서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이 광야에서는 돈벌이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전투적으로 모칠라를 판다. 아이들부터 할머니까지. 아침이고 저녁이고. 더운 사막 땡볕에 스페인어도 못하는 이 아이들은 모칠라 열여 개를 양팔에 잔뜩 낀채 방황한다.




  그래서 이곳 아이들은 차만 지나가면 손을 뻗고 소리친다. 여기 잠시 멈춰서 물건 좀 봐 달라는 이야기다. 여기 아이들은 왜소하다. 팔찌를 사달라고 내게 말 걸던 12살 아이는 겉보기에는 10살도 안되어 보였다. 그마저도 바짝 말랐다.


카보 데 라 벨라. 또 올 수 있을까?


  라 과히라는 절대적 빈곤에 있는 사람이 전체 인구에 26.7%에 달한다.* 여기서 절대적 빈곤의 기준은 세계은행이 정한 하루 $1.9이다. 콜롬비아 빈곤율 통계에 의하면 콜롬비아 전체 절대적 빈곤 가구율은 7.6%이다. 그중 20%가 넘는 지역은 초코 주, 라과히라 주, 그리고 카우카주이다. (밀림에 있는 아마조나스와 같은 주들은 통계에서 빠졌다.) 하나같이 다 콜롬비아 비주류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다.




  하루 $1.9달러로 산다는 건 상상조차 힘들다. 하루 2500원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심지어 이 돈은 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상 한 가정을 의미하니 더 끔찍하다. 라 과히라 주는 물조차 구하기 힘든 척박한 땅. 그래서 아이들과 할머니들은 팔찌와 모칠라 백을 들고 마을을 헤매는 것이다. 우리 돈으로 고작 비싸 봐야 2만 원 하는 이 가방. 이 가방에 음식, 학교 다닐 돈, 옷, 마실 물, 모든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어떤 여행은 놀라운 경험이다. 아름다운 대 자연 아래. 사람도 살기 척박한 땅에서. 아주 가소롭기 짝이 없는 나의 어쭙잖은 얕은 탄성이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손을 뻗는 것이 버릇이 된 삶에서는 벗어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 본다.


*출처:https://www.larepublica.co/economia/en-narino-choco-y-cauca-se-es-pobre-con-menos-de-225000-segun-el-dane-2884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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