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일진이랑 왕따 가해자들 다들 좀 그만 살아!

by 비차

학창시절의 기억은 나를 일정 부분 불구로 만들었다. 나는 아직도 말에 쉽게 욕을 섞거나, 장난인 것이 명백하더라도 상대를 낮추거나 비아냥이 섞였다고 판단되는 발언, 그리고 폭력적인 제스쳐를 보면 몸이 굳는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리고 천적을 앞에 둔 가젤처럼, 뒷걸음질을 치며 몸을 뺄 타이밍을 재게 된다. 사람을 겉모습이나 말투만 보고 쉽게 판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몸이 굳고 겁이 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내가 졸업한 중학교는 일본의 막장 일진 만화, 이를테면 GTO같은 곳이었다. 수업 중간에 내내 자다가 나이 지긋하신 영어 선생님이 막대기로 머리를 툭툭 치며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책상과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 일어나 선생님 앞에서 책상을 걷어차며 사람 머리를 건드냐고 시발 썅 욕을 뱉다가 교실 뒷문 문짝을 걷어차고 뛰쳐나간 아이도 있었고, 남자애들이 점심 시간에 학교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고 소화기를 터뜨려 5층이 온통 하얀 가루로 도배되기도 했고, 그걸 혼내려고 애들을 교실 앞으로 불러낸 선생님 앞에서 만취해 새빨개진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술 안 마셨다고 대여섯 명의 남자애들끼리 장난을 치고, 좋은 것이 있다며 보여주겠다고 가방 안에 아홉 갑짜리 담배를 자랑하며 담배가 많다고 하는 아이도 있었고 ... ... 기타 등등 ... ...


대체 어느 시절에 무슨 학교에 다닌 거냐고 의아해 하실 수 있겠지만 평범한 국공립 중학교였다. 우리 학년이 모두 전학생들로만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빼면.


대전 둔산동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무렵 계룡시로 이사를 했다. 엄마가 이모를 따라 구경을 간 신축 아파트 단지가 베란다 앞에 산이 있어 무척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고, 엄마는 그 풍경에 한 눈에 반해 "옛날부터 진정 성공한 사람들은 시골과 도시의 경계지역에 살아서 시골의 감수성과 도시의 문화를 함께 접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사를 감행했다. 작은 시골 마을에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이어서 아파트 단지 근방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새롭게 세워졌다.


본래대로라면 신설 중학교는 근방에 사는 아이들로 구성된 신입생들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었지만,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엄마들의 교육청 민원("집 코앞에 학교를 두고 차로 30분 거리를 가라구요?")으로 인해 2학년, 3학년 전학생들을 받기로 했다.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아서 2학년은 반이 고작 두 개였고, 3학년은 한 개였다. 그 전학생들 중에는 나처럼 아파트 단지가 생기며 이사를 와 피치 못하게 전학을 해야만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근처의 학교에서 한창 일진 행세를 하며 문제를 일으킨 전적이 있거나 괴롭게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들이 더 많았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에서 "잘 나가고" 싶어 했다.


당시의 나는 아이돌보다 책을 더 좋아하고, 친구들보다 그림을 더 좋아했다. 어릴 적, 핑크색과 레이스와 프릴을 좋아하던 어린 여자아이는 괴롭힘을 많이 당하기 마련이었고, 나는 늘 마르고 작고 왜소한 타입이었기 때문에 하교를 하다가 가방을 뺏기고, 뒷통수를 때리고 도망가고, 치마를 뒤집고, 실내화 주머니를 가로채 뛰어다니는 남자애들에게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핑크색 옷들을 모두 버리고, 치마도 절대 입지 않고, 어떤 장난을 치든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친구는 가장 친한 한두 명과 붙어 다녔다. 자연스럽게 소외되었다.


그게 오히려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께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으니까, 너는 또래와 남다르다는 말을 했으니까, 생각이 깊다던가 책을 많이 읽어 똑똑하다던가 하는 말들을 하셨으니 내가 좀 더 미래 지향적이며 어른스러운 거라고 합리화를 했다. 동시에 집안의 사정으로 나는 자주 혼자 있었고, 혼자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공부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블로그에 그림을 올리며 글을 쓰는 취미를 들였다. 그런 내게, 이 학교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나는 아이돌을 좋아하고 화장을 열심히 하는 여자 아이들과의 이야기에 잘 섞일 수 없었고, 술과 담배와 게임과 섹스 이야기를 하는 남자 아이들과는 더더군다나 거리를 크게 두었다. 아마 그 아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진지하고 질색하는 내가 짜증나지 않았을까. 겉으로 반응이 잘 나오지 않으니 크게 건들이지는 않았지만, 툭툭 건들이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이었다.


Y가 없었다면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네시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늘 혼자였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열시까지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고, 해외 출장이 잦아 얼굴을 보는 날보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았던 아빠, 전통 찻집을 시작해 보시겠다고 갓 일을 벌려서 밤 늦게서야 일을 정리하고 돌아오시던 엄마. 나는 자주 집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파트 근처에는 온통 산이니 논밭같은 것 뿐이고 문방구를 가려고 해도 왕복 사십분을 넘게 산을 넘어 걸어가야 했다. 어릴 적 근처 살던 친구들은 이제 보러 가려면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넘게 가야했다. 집 안에서 컴퓨터를 켜고 멍하니 있으면 석양이 새빨갛게 지고 물이 차오르듯 밤이 차올랐다. 불도 안 켜고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티비를 켜놓고 잠을 자곤 했다.


애초부터 어린 아이가 좋아할만한 음식이 없는 집이었지만, 이때부터 엄마가 채식주의를 시도하시며 통조림이니 간편 조리 음식들까지 모두 치워 놓아서 집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당연히 돈도 없었다. 간식으로 생마늘을 전자렌지에 돌려 먹으라고 하시고, 계란이나 라면도 자주 떨어져서 자주 굶었다. 실은 무얼 먹고 싶지도 않았다. 사무치게 외로웠고, 몸이 떨리도록 세상에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집이 텅 비니 Y가 종종 집에 놀러오곤 했다. Y는 김치볶음밥을 잘 만든다고 후라이팬 가득 요리를 하다가 집에 햄이나 고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내가 유일하게 생마늘을 꺼내 보여주며 이거 전자렌지에 구워 먹으면 고기 맛이 난다고 간식이라고 먹어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경악하며, 자기 집에서 몰래 햄이니 참치니 하는 통조림 몇 개를 가져다 주었던 기억이 난다. 주방에 놓았다가 그것 역시 오빠가 뺏어다 먹었고 싸우고 했지만. 뭐.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까. Y는 내가 성인이 되어 탈가정을 하고, 경제적 독립을 하고 난 뒤에도 인사처럼 나한테 고기는 좀 먹고 사냐고 묻곤 했다.


이런 와중의 학교 생활, 당연히 평탄하지 못했다.


떨어뜨린 지우개를 주워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키가 이십센치 가까이 큰 남자애가 교실에서 철제 의자를 들어 내리치려고 했다. 아마 지우개를 주워주지 않았다는 건 이유가 아니었을 거다. 그때는 왕따를 당하던 여자아이 둘을 Y와 내가 받아주며 같은 반의 분위기를 주도하던 여자아이들 무리와 척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아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거겠다. 의자에 맞지는 않았지만 몹시 충격이 컸다. 싸움이 커지자 선생님이 달려오고 교무실로 불려갔는데 교무실에서조차 상담 의자를 걷어차며 "씨발년이 싸가지가 없어서"라는 이유로 욕을 하고 반박을 하자 교무실 의자를 치켜들어 남자 선생님이 깜짝 놀라 달려와 뒤에서 팔을 결박해가는 일이 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너무 많은 ... ...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얼굴도 자주 보지 못하는 가족들은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었다. 그나마 엄마를 기다려 용기를 내 입을 열려고 하면 "피곤하니까 내일 이야기 하자"거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말이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이후로 아직까지도, 장난으로라도 때리는 시늉을 하는 남성을 보면 몸이 굳고 경고등이 울린다. 친하거나 호감이 있거나 하는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그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생각이 1순위가 된다. 특히 신체적으로 나보다 크거나 덩치가 있으면 더 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떠나고 싶었다.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특히 집을 아주 떠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고, 애들이 아닌 어른스러운 어른들만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대학은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같은 것이어서 사활을 걸고 했던 것 같다.


기대가 부족하지 않도록 나는 서울에 와서 햇수로 9년째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 현실 내에서 존재하는 유토피아란 그렇고 그건 환상이나 상상으로 만들어놓은,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에나 납득 가능한 관념 속의 것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깨닫는 9년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면 내 어릴 적 철없는 아이들로 인한 두려움이나 트라우마도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성인 여성으로 겪는 세상은 청소년 여성으로 겪는 세상과 몹시 비슷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더 심각했다.


당장 길거리만 걷더라도 번호를 달라고 하고 싫다는 말에 욕을 하며 뒤를 쫓아오는 취객, 손목을 쥐고 악력을 쓰며 놀고 가라고 아니면 번호 주고 가라고 어디 가지 못하게 끌어당기는 남자, 비싼 척 한다며 뒷통수를 때리고 튄 남성이나, 집 앞에 숨어있다가 내가 외출하려니 튀어나오던 스토커, 만나주지 않는다고 자살 일기를 써 자신의 자살사고와 자살하려는 방식을 노트 한 권에 써서 준 남성, 내가 겪은 것을 다 쓰지 않더라도 접하게 되는 온갖 뉴스와 매체에서 보이는 여성 살해와 상해 사건들 ... ... 나는 신체가 약해 저 사람이 욱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아주 본능적으로 했고 그냥 납득했다. 중학교에 있던 그 아이들도 지금쯤 성인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욕설과 폭력의 뉘앙스에 몸이 굳는 것은, 정말로 어찌 할 수가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는 몸집이 큰 사람만 보아도 몹시 어려워하고 무서워했는데, 이제는 조금 나아져서 몸집보다는 비쳐지는 폭력성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지만.


종종 궁금하다. 내가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타인을 압도할만한 피지컬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똑같은 일을 겪었을까? 내가 지금 무언가를 해서 신체 능력이 월등해지면 이런 일을 안 겪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보며,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툭 건들이면 팔 부러지겠다" "로우킥 하면 다리 부러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아무런 의식 없이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어째서.


엇그제는 운동을 배워보라는 말을 들었다.


운동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 중에서도 호신술이나 격투기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 했지만, 근육 빵빵한 남성을 보거나, 그 사람이 스스럼없이 말이나 신체 접촉이나 힘을 쓰는 모습을 보이거나, 어깨만 힘줘서 두드려도 나는 경악할 것 같아 무서워서 할 수가 없다 ㅇ<-< 근데 이걸 또 구구절절하게 나는 이런 사연이 있어서 이런 걸 무서워하고 이래, 하는 설명을 하는 게 너무 구차한 것 같아서, 말을 하다가 말았고... ... 새벽에 생각나서 또 구구절절하게 옛날 얘기를 꺼내 보았지... ...


저의 최선의 운동은 아직까지 오락실 펌프인 것으로 하고, 우리 좋은 말, 고운 말, 고운 행동을 하도록 합시다... ...(′·ω·`) 무서우니까... ... 그리구 학창 시절 일진이랑 왕따 가해자들 다들 좀 그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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