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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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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빈 Sep 23. 2022

제주에 멈춘 시간 / 김보희 화백

생의 찬미 (1)

 

살면서 아름다움을 칭송하게 되는 순간들이 얼마나 자주 있을까. 현실은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도 벅차게 한다. 언젠가의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늘 급히 뛰어다녔다. 빛, 바람, 자연의 색, 계절의 향기 같은 것들을 모두 담고 싶었다. 멈추기 위해서 뛰었다. 더 오래 멈춰 서서 더 많이 담기 위해.


멈추지 못하게 눈치를 주는 어른들의 세상은 순수함을 가져가고 노하우를 줬다. 더 빨리 일하는 법.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법. 돈으로 고통을 잊는 법. 대충 어른인 척하는 목소리와 태도 따위. 집 계약이라던지 대출이라던지 보험처리라던지 하는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다 보니 아름다움을 느낀 기억이 희미했다.  


제주에 오고 이 주쯤 지난 어느 날. 다름없이 혼자 러닝을 하다가 너무 신이 나서 “행~복~해!!!!!!!”라고 소리쳤다. 맑고 진한 남색 하늘 아래 높게 뻗은 야자수들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편인데 그러지 않고서야 이 감정과 풍경이 아까웠다.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 눈물이 터졌다. 이런 눈물이라니. 오글거림을 참을 수 없으나 행복도 참지 못해 으아앙 울어버렸다. 나 자신이 불쌍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1km 채 안 되는 거리에 열 번을 넘게 멈춰 서서, 아름다운 생이라며 역시 살아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중문동에 살았다. 지금은 옆 동네로 이사를 왔지만 중문동은 좋은 선택이었다. 배릿내 오름을 지나 색달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매일을 생생하게 했다. 등산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걸음으로도 한눈에 멋진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나만의 장소라. 주민의 특권이라며 더 기쁘게 누렸다.


좋아하는 작가가 나와 같은 공간을 공유한 작품을 볼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타인의 시선과 고민이 나에게 겹겹이 쌓여 더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최근에 그런 경험을 했다. 바로 제주로 내려온 김보희 화백의 <the Days> 개인전이다.


The days, 2022


JUngmoon streeet 201908, 2019


<the Days>. 작가 본인의 한 작품의 제목이었던 <The days>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번에는 소문자로 특별한 한 날이 아니라 '그날들'. 제주도에서 사는 그 삶. 그런 평범한 날들이다.


나는 안다. 위 작품 속 노을색은 과장된 색이 아니라 평범한 날들의 색이다. 매일 저 길을 뛰어 내려갔다. 내려갔다기보다는 끌려갔다고 할 수 있다. 높은 채도의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을 보러 갔다. 지금도 종종 마음이 답답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차를 타고 중문으로 향한다.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멈춰 선다. 그러면 금세 평범한 하루가 좋아진다.


더 어렸던 나는, 또는 서울에서의 나는 어떤 특별함을 그렇게 원했을까? 내가 특별하기를 바랐을까. 세상이 특별하기를 바랐을까. 평범함이 두려워 그것만은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특별히 편협한 생각이라고 지금의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하여간 그날들은 아름다워. 또는 그냥 그런 시시함에 기대고 싶은 믿음.

 

Jungmoon street 2019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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