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는 무너짐

by Erasmus Kim

체중계에 올라서자 디지털 숫자는 61.5를 가리켰다. 일주일 사이에 몸무게가 4킬로나 빠졌다. 몸무게가 줄었을 거란 예상은 했다. 야근이 계속됐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지치고 힘든 나날 속에 밥은 도통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구운 계란 하나, 요구르트 몇 숟가락, 크리스피크림 도넛 두어 개, 커피우유.

그게 지난 며칠간 내 식사였다. 출근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와이프가 안쓰럽다며 숭늉을 내어줬지만,
그것마저 반쯤 떠먹다 숟가락을 놓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며칠째 이어진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졌지만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깼다. 새벽 한 시. 그 후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 생각들은 커지기만 했지, 결코 줄어들 줄 몰랐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 그토록 불안했을까.


일단 뭔가 해야 할 것 같아 거실로 나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털썩 앉았다. 창밖은 고요했지만, 내 머릿속은 낮보다 더 시끄러웠다. 일이 손에 안 잡히면 나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일이 잘 풀릴 때조차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발끝을 붙잡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감정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몇 해 전에도, 그전에도.
다만 그땐 이 감정이 '불안'이라는 이름일 줄은 몰랐을 뿐이다. 이제는 이름을 알고 나니, 오히려 더 두려워졌다. 불안은 늘 거기 있었다.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내가 웃고 있을 때도, 회식 자리에서 떠들고 있을 때도,

주말에 아이와 놀이터를 걸을 때도 그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사람들이 보기엔 평범한 하루들이었다. 퇴근길에 딸아이 간식 사들고 들어서면 아빠 왔다며 달려드는 아이가 있었고, 와이프는 따뜻한 국을 끓여놓았다. 나는 웃었고, 대답했고,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내 안 어딘가에선 늘 작은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무너지면 안 된다고 애써 모른 척하며 버텼지만, 지금 이 체중계의 숫자가 말해준다. 나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던 거라고.

아주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나는 다시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새벽 공기가 등줄기를 타고 스며들었다. 내일은 또 출근을 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선 아무 일 없는 척을 해야 한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갔다.

이후로 불안이 잔잔해지거나, 갑자기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최악의 밤’은 다시 오지 않았다. 까닭 없이 또다시 두려움이 몰려온 어느 밤에도 나는 여전히 잠을 설쳤지만, 그때 그 밤보다는 나았다. 몸부림치고, 버티고, 체념하고, 그러다 받아들이며 몇 달이 흘렀다.

불안은 여전히 내 곁에 있었지만, 나는 나름 잘 자고, 잘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 ‘최악의 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건 분명 무척이나 힘든 밤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저 또 하나의 '살아낸 밤'이기도 했다.